호텔 내 자판기에서는 여전히 220엔짜리 콜라를 팔고 있었다. 쓸데없이 비싼 건 변하질 않는다고 중얼거리면서도 오백 엔짜리 동전을 넣고 콜라를 뽑으려던 건 이치로 본인의 선택이다. 본래보다 130엔이나 더 비싼 무설탕 블랙커피 버튼을 눌러버린 것도 본인의 선택이었고. 왜 손가락이 삐끗했냐 하면, 향 때문이다. 야마다 이치로에게는 백 미터 밖에서 맡아도 느른하던 신경줄을 단숨에 잡아채게 만드는 향이 있었다. 낮게 터지는 웃음소리, 목 뒤로 걸리는 가죽 재킷의 촉감, 뺨을 간지럽히는 머리카락, 당연한 듯 곁에 서 무게를 싣던 남자의 기억까지 함께 불러와서 곤란했으나.
그렇게 독한 걸 피우니 제 명에 살겠느냐고 주변인들이 손사래를 칠 때마다 가슴이 덜걱거리면서도, 그린 듯 매캐한 향은 남자 고유의 체취와 꽤 잘 어울렸다. 좋게 말하자면 섹시했고 나쁘게 말하자면 날티 나는 향과, 별이 그려진 담배곽이 남자의 손에서 뭉개지는 것을 이치로는 꽤 좋아했다. 그러니 더티독 와해 후 한동안은 곁에서 그 독한 향이 나면 고개를 처들었던 거고. 얼굴을 확인하면 과연 헤비 스모커들이 좋아한다는 품목답게 열에 여덟은 연식 깨나 나가는 이들이었다. 애초에 요코하마로 떠난 사람이 이케부쿠로에 있을 리도 없었지만, 거의 척수반사 수준으로 반응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까, 세컨드 배틀 때도 아오히츠기 사마토키의 접근을 바로 알아차리지 못한 건 피우는 담배가 바뀌어서 그런 거다. 기존에도 독했는데 바꾼 건 더 심했다. 시가 향 같은 게 섞여서 조금 더 야쿠자스럽고 나이 들어 보이는 선택이었는데, 비흡연자로서는 원래 피우던 게 무엇 때문에 질린 건지 알 길이 없었다. 평화라고 쓰여진 패키지라든가 비둘기 그림 같은 건 죽어도 안 어울리는 사람이.
그래, 솔직해지자. 향이 바뀐다는 건 꽤 중요한 문제다. 뿌리던 향수를 바꿔서 이미지 전환을 하는 경우도 왕왕 있지 않은가. 야마다 이치로는 제가 알던 아오히츠기 사마토키가 다른 무언가로 뒤덮이는 것이 싫었다. 이 년 사이 이치로는 머리가 컸고, 잔뼈가 굵어졌고, 요로즈야 야마다는 제법 순항하고 있다. 반면 사마토키는…. 카텐구미의 와가카시라가 되었다. 한 올 한 올 왁스로 머리를 고정해 넘기던 습관은 어디 갔는지 대충 내려둔 꼴이 저와 비슷했고, 질 좋은 셔츠의 윗 단추는 왜 푸르고 다니는지 모르겠으며, 요코하마의 2번 3번에게 꽤 허물없이 굴었다. 이전에 두르고 다니던 갑옷이라도 내려둔 듯이. 분명 한참 어른이었는데 이제는 그렇게까지 ‘멋있지’ 않았다. 그러나 종종 이치로는 그 안에서 더티독이었던 아오히츠기 사마토키를 좇았다. 그게 문제였다.
그러니까….
“콜라만 주구장창 마시던 놈이 무슨 놈의 커피.”
“…잘못 눌렀어.”
“바보냐?”
누구더러 바보래. 말꼬리를 늘이며 이치로는 사마토키를 돌아본다. 안 하던 짓을 하게 되는 건 전부 다 이 남자 때문이다. 이 년 내내 다른 담배를 물고 다니더니 간만에 낯설지 않은 향을 풍기고 있었기 때문에 당황했던 거다. 다시 원래 피우던 걸로 돌아간 건지, 일시적인 건지는 몰라도 그것이 달갑다는 점이 짜증 났다. 본인은 아무 의도도 생각도 없을 거라는 점까지도.
“뽑았으면 저리 비켜. 쓸데없이 부피만 커서는.”
팔꿈치로 밀어내는 통에 얼른 자판기 아래에서 커피를 꺼냈다. 내가 큰 게 아니라 당신이 마른 거 아니냐고. 키는 저보다 1cm 더 크면서 뭘 먹어도 좀처럼 살이 붙지 않는 걸 보면 체질이었다. 근육 무게 때문인지 생긴 것보다는 무거웠지만. 물기가 맺힌 캔커피의 표면을 내려다보고 있자 흰 손이 그를 채간다. 동시에 쥐여주는 것은 늘상 마시던 콜라였다. …진짜 뭐지, 이 인간. 뭐에 씌기라도 했나. 해괴망측한 것이라도 보듯 시선을 두자 다시 휙 손이 날아든다. 피한 것은 반사적이었다.
“꼽냐? 그럼 다시 내놓든가.”
“누가 안 마신대? …근데 당신은 그걸로 돼?”
“안 돼.”
딱 잘라 말해 놓고, 굳이 뚜껑을 따서 한 모금 마시고는 재라도 삼킨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커피에는 제가 원두를 골라 직접 내려 마실 정도로 진심인 사람이니 자판기 캔커피 따위가 취향에 맞을 리 없다. 실제로 같이 지내며 그런 걸 마시는 것도 본 적 없고. 그런데 왜 바꿔준 건데…. 어쩐지 간질거려서 뒷목께를 주무르던 이치로가 쥬토나 줘야겠다, 소리에 캔커피를 뺏어들었다. 황당한 표정으로 눈썹을 찡긋거리는 남자가 보였다. 변명할 말도 없어 입술을 꾹 다문다.
이루마 쥬토, 그 남자는 아마 사마토키보다는 덜 까다롭게 굴겠지만 그래도 이런 편의점 자판기 취향은 아닐 터였다. 남이 한 입 마시다 버린 걸 굳이 입 대고 마실 일도 없을 테고. …아니, 이런 건 다 추측이고 사실은 모른다. 제게는 한참 어른 같아 보였던 사마토키는 매드 트리거 크루 내에서는 가장 어렸고, 동료 둘을 신뢰하다 못해 가끔 너무 풀어지는 거 아닌가 싶을 만큼 허물이 없었으므로. 야마다 이치로는 아직도 요코하마의 리더로서 기능하는 아오히츠기 사마토키를 잘 몰랐다. 이 년의 간극이 낯설고 서러웠다. 그리고 그 서럽다는 감정이 문제였다. 버림받아 놓고 좋았던 시절을 잊지 못하는 건 저뿐인 것 같아서.
“뭐 하는데?”
“안 마실 거잖아.”
“안 마실 거라도, 먹던 걸 뺏네 새끼가. 그렇다고 네놈이 마실 것도 아니면서.”
“마실 거야.”
“아서라, 카페인 때문에 잠 못 자서 내일 배틀 망칠 일 있냐.”
또 애 취급이다. 야마다 이치로가 카페인에 약한 건 사실이었으므로 딱히 할 말은 없었다. 대꾸를 안 하니 말싸움에서 이겼다고 생각하는지 시원하게 호선을 그리는 입매 사이에 담배가 물렸다.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일전의 그 담배로, 제 후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게 또 신경질이 났다.
“그런 걸로 망칠 것 같아?”
“그럴 수도 있지. 그게 아니면 옛 정 때문이든가.”
뭐라는 거야. 이번에는 진지하게 헛웃음이 터졌다. 요코하마와 이케부쿠로의 거리만큼이나 잘 마주칠 일 없는 사람과 이렇게 부대끼고 있는 것은 새삼스럽지만 랩 배틀 때문이다. 별안간 히프노시스 마이크가 전부 작동하지 않아 온 거리가 개판이 되었다가, 3차 디비전 랩 배틀을 진행한댔다가, 이제는 또 파이널이란다. 여기서 최종적으로 이기는 팀에게 이 나라를 통치할 권리가 주어진다나. …솔직히 말해 중왕구가 한 것 중 제일 해괴한 소리였다. 하지만 늘상 그랬듯 참여해야만 했고, 할 거라면 이겨야 했다. 그것이 마이크를 쥔 자의 숙명이었으므로. 대진표를 봤을 때 이 남자와는, 둘 다 이긴다면 두 번째 배틀부터 붙는 셈이 된다. 그런데 ‘옛 정 때문’이라니. 누가 할 말을.
“당신도 사사라 씨랑 붙잖아.”
“이 몸은 팀 깨졌다고 누구처럼 질질 짜진 않았는데.”
“누가 질질 짰다고, ….”
그래, 좀 울었다. 그게 라무다와 진정 히프노시스 마이크 때문이었다는 건 뒤늦게 알았으나 갑작스러운 이별은 슬펐기 때문에. 하지만 어깨 위로 팔을 두르고 그걸 위로해준 건 당신이잖아. 살아있으면 또 어딘가에서 만나 얘기할 기회도 있다고 해준 건 아오히츠기 사마토키였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겠다고…….
그런 걸 토로해 봤자 눈 하나 깜빡하지도 않을 사람인 걸 알아서 입맛이 썼다. 그게 뇌리에 박힌 건 사실 저뿐이고, 상대방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면 그건 좀 타격이 클 것 같으니까. 그러니까 대화가 겉돈다.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 기껏 포장이라도 되어 있었던 게 들추고 나면 텅 비었을지도 모르는 거니까. 그래서 야마다 이치로는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파이널, 이라고 이름 붙인 배틀의 직전에도. 그러는 사이 내내 입에 물고 흔들거리던 담배에 불을 붙이려는지 주머니를 뒤진 남자가 낭패라는 표정으로 얼굴을 구겼다. 불행히도 자판기 앞에는 담배 같은 건 입에도 안 대고 콜라 외길 인생인 애새끼 하나뿐이었다.
“간다.”
사마토키가 홱 몸을 돌렸다. 직전까지 배틀 얘기를 하던 것치곤 지체 없는 발걸음이다. 담배 한 개피에 얼마나 목을 매는지 지켜본 입장으로서는 이해도 갔으나 조금 열이 받았다. 전에 없던 피어싱이 눈에 들어온 것도 그 때다. 분명 왼쪽에는 귓불에 하나, 귓바퀴가 두 개였는데. 링 모양의 피어싱 위로 심플하고 둥근 게 하나 더 늘어나 있었다. 단숨에 머리가 뜨거워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사마토키의 어깨를 붙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긴 채였다. 콜라병이며 페트병이 떨어져 날카롭게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났다. 남자의 시선이 느릿하게 바닥을 훑었다가 제 손으로 향했다.
“뭔데.”
“얘기 좀 해.”
“무슨 얘기?”
무슨 얘기든, 아니. 어떤 말을 꺼내도 화부터 날 것 같았다. 단단한 어깨를 갈고리처럼 붙든 손가락에 힘을 빼려고 노력했다가, 담배 앞에 촛불만큼이나 흐릿한 인내심으로 제 손을 쳐내는 사마토키의 손목을 다시 붙들었다. 아니 시발, 왜 이러는데? 짜증 섞인 목소리가 늘어졌다가 이치로의 표정을 보고 뚝 끊어졌다. 이를 어찌나 악물었는지 보는 사람이 다 턱이 아픈 것 같았다. 속으로 욕을 삼킨 사마토키가 그대로 허리를 굽혀 나뒹구는 음료 두 개를 한 손에 쥐었다.
“네놈 방은 어딘데.”
“…어?”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빨리 끝내고 불 찾으러 가게.”
근데 우리한테 무슨 할 말이 더 있다고, 여상하게 중얼거리는 말투가 차가웠다. 야마다 이치로에게 배정된 객실은 다행히도 자판기와 같은 층이었으므로, 카드키를 찍고 들어가자마자 사마토키가 협탁 위로 콜라와 커피를 내려 두고 침대 위로 걸터 앉았다. 긴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폼이 어디 한 번 지껄여 보라는 자세다. 그를 지긋이 들여다보다 야마다 이치로가 발을 움직였다. 앉은 바로 그 앞에 우뚝 멈춰 선 이치로가 손을 뻗어 새 피어싱 위를 꾹 눌렀다.
“이건 언제 뚫었어?”
친하지도 않은, 정확히는 얼마 전까지 철천지 원수 같던 놈이 대뜸 귀를 만지작거리는 상황이란. 퍽 당황스러워서 밀치거나 뿌리치거나 팰 생각조차 하지 못한 사마토키가 반 박자 늦게 얼굴을 구겼다.
“뭔, 씨발…. 그 얘기 하려고 부른 거냐?”
“알려줘, 사마토키.”
씨 붙이라고, 늘상 하던 말을 내뱉으려던 아오히츠기 사마토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 새끼 빡쳤는데…. 문제는 왜 빡쳤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심지어 오늘은 꽤 상냥한 짓도 해 주지 않았던가. 등신같이 커피랑 콜라를 헷갈려 잘못 뽑은 것도 바꿔먹어 줬는데. 다짜고짜 욕을 박고 대화를 시작하지도 않았고. 라무다가 솔직해졌던 지난번에 미적지근한 사과를 주고받고 나서는, 사마토키 딴에는 꽤 노력하는 중이었다. 물론 이 년 내내 만나자마자 싸우려 든 가락이 있는 데다 이치로 이 자식이 여즉 반말을 하는 중이라 단번에 희희낙락하는 사이가 되는 건 아니었지만. 애초에 인생에서 야마다 이치로와 아오히츠기 사마토키가 제일 좋았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니까.
계속 귓불 위를 누르고 있는 엄지와 검지가 뜨거웠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존재감은 느껴질 정도의 강도였다. 그러니까 유추해 보건데, 놈이 꽂힌 것은 새로 뚫은 피어싱이다. 그런데 내가 귀에 구멍을 하나 더 뚫든 말든 이 자식이랑 무슨 상관인데? 말해줘야 할 의무 따위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고분고분 입을 연 건 얼른 돌아가 담뱃불을 붙이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쓸데없는 정보까지 줄줄 읊고 말았지만.
“얼마 전에.”
“왜 뚫었는데?”
“파이널이라길래 각오를 다지려고 뚫었다, 왜. 원래는 손가락 하나쯤 자를까 했는데 두목도 그렇고, 주위에서 하도 뜯어말려서….”
귀에서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져 혀를 깨물 뻔했다. 이 미친 새끼가 대체, 하는 표정으로 올려다보자 낯빛이 새파랬다. 사마토키가 이치로의 손목을 비틀어 떼어냈다. 그렇게 사람을 끌어댄 것치고는 허무할 만큼이나 쉽게 떨어진다. 그러니까 네가 대체 왜. 방금의 어느 부분 때문에 그렇게 숨도 못 쉬고 못 박힌 것처럼 서 있는데.
“어이, 이치로.”
“…….”
“너도 네놈이 이상한 거 알지.”
집안에, 아니. 형제 사이에 우환이라도 있나. 근데 그럼 저들끼리 해결할 일이지, 나를 여기다 앉혀 놓고 뜻모를 소리를 내뱉진 않을 텐데. 이쯤 내빼지 않으면 정말 귀찮은 일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 문 쪽을 쳐다보자 시야가 차단된다. 별안간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놈 때문이다. 까만 정수리가 내려다보이는 시야가 기묘했다. …이건 진짜로 안 되겠는데. 일어서려고 움찔하는 허벅지를 팔로 누르며 야마다 이치로가 아오히츠기 사마토키의 손을 잡아 포갰다. 깍지를 꼈다가, 손가락 마디마디를 확인하듯 쓸어내리는 동작이 진지하기 짝이 없다.
“이상한 거 알아.”
“허….”
“아는데, 도저히 안 되겠거든. 왜 야쿠자 같은 게 된 거야? 나더러는 해결사나 하라더니, 당신은 왜 그렇게 위험한 길을 고른 건데. 손가락을, 이걸, 자를 데가 어디 있다고…. 그것도 자진해서 자르겠다고 했다고.”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이번에는 아오히츠기 사마토키가 입을 다문다. 야마다 이치로가 정말로 억울해 보였기 때문이고, 제 손가락이 무슨 유리라도 되는 듯 신중하게 쓰다듬고 있었기 때문이고…. 딱히 할 말이 없어서기도 했다. 애초에 밑바닥 인생이었던 것, 기왕 악당일 거라면 개중에서도 바닥을 찍자고 생각했을 뿐이다. 일단 한 번 영혼을 팔면 예전의 자신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끊어서 파는 게 아니라 일시불로 납부하자고. 야마다 이치로에게 자신만만하게 말했던 것치고는 모순된 행보였다.
“……당신은 우리가 한 게 화해라고 생각해?”
“그
럼, …아니면 뭔데.”
내가 미안하다고 했고, 너도 미안하다고 했고. 이제 잊어버리자는 말은 야마다 이치로가 먼저 했고. 그것은 갑작스러운 사과와 내내 누렸던 특별 취급의 종지부에 얼떨떨하게 튀어나온 반응에 가까웠다. 당신에게 무언가라도 될 수 있다면. 아끼는 후배에서 마주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는 사이, 더러운 위선자든 뭐든 내 이름이 나왔을 때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보다 더 크게 반응해 준다면. 차라리 그게 더 나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제가 모르는 사이 자꾸만 달라지는 아오히츠기 사마토키라는 남자를 붙들어 두고만 싶었다. 손가락을 자르겠다는 말을 그렇게나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남자였으니 또 어디서 칼을 맞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다가 만약 당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살아있지도 않게 된다면. 대화를 나눌 수 없게 된다면.
조바심이 나 숨이 막힌다.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그렇게 끝낼 수는 없는 거였잖아. 당신도 알잖아. 건조한 사과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차라리 주먹을 날리든 발로 차든 하라고. 외로우니까. 우리 사이에 그런 증오조차 없으면 정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 같으니까.
내도록 담아 두었던 말들이 둑이 터지듯 줄줄 흘러나왔다. 확인받기 두려워 요점을 빙빙 돌리고, 시비나 걸어 포장하던 알맹이가 바닥으로 흩뿌려진다. 아오히츠기 사마토키가 저를 미친 새끼라고 하든, 또 버튼을 누르든 무서울 게 더 뭐가 있을까. 당장 내일 이 벽이 부숴질지도 모르는 판인데.
“적어도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은 나한테 줘….”
당신이 귀를 새로 뚫고 담배를 바꾸는 데에, 상관할 만한 사이가 되고 싶은 거라고.
젖은 입술이 틀어쥔 손등을 타고 내려갔다. 약지 위로 돌연 이를 세운 탓에 등줄기로 소름이 내달렸다. 물어뜯길 것 같은 감각이다. 저놈의 눈이, 저만큼 처절해 보이기는 그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줄줄 울고 있는데 한없이 무표정한 낯이 도리어 아파 보였다. 그딴 거 약속할까 보냐고, 누구 맘대로 네놈에게 그런 걸 주냐고 목전까지 치밀었던 말이 가라앉는다. 아무래도 이 년 전부터 사마토키 본인은 이치로의 우는 얼굴에 약했다. 사내놈이 그딴 걸로 울지 말라고…. 그러나 하라이 쿠코와 갈라섰을 때 대성통곡하던 놈은 더티독이 해체했을 땐 충분히 울지 못했다. 제 손으로 그럴 기회조차 빼앗았으므로.
그리고 문득 아오히츠기 사마토키는 깨닫는다.
“이치로, 너…. 나를.”
좋아하냐는 물음까지는 차마 뱉지 못하고 혀끝에서 걸린다. 그러나 굳이 말로 꺼내지 않더라도 둘 다 같은 것을 생각했음은 자명하다. 왼손 약지에 빙 둘러 난 잇자국이 동그랗게 번졌다. 이제 제법 어른스러운 태가 나는 뺨 위로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그를 황망한 얼굴로 바라보며 사마토키는 생각했다. 이건 이 년 전의 업인가. 현실적인 문제들이 뇌리를 스쳤다가 이내 사라진다. 책임을 질 수는 없어도 매듭은 지어야 했다. 야마다 이치로는, 가족을 제외하고 아오히츠기 사마토키가 가졌던 것 중 가장 좋은 것이었다.
후드의 갈라진 부분을 틀어쥐고 강하게 끌어당기자 반동으로 매트릭스 위에 등이 닿았다. 이제는 야마다 이치로가 아오히츠기 사마토키를 내려다보는 자세다. 젖어 번들거리는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를 올려다보며 사마토키가 길게 한숨을 내뱉는다.
“네놈한테 줄 수는 없어. …장담 못 해.”
“…왜?”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거짓말하고 싶지 않거든. 낮게 뇌까리는 목소리와 동시에 등 뒤로 어설프게 넘어간 손이 그대로 힘을 주어 당긴다. 반응할 새도 없이, 한 뼘의 여유도 없는 채로 몸이 겹쳤다. 울음을 그치는 데에는 직빵이었으나, 내내 울어 산소가 부족한 뇌에서는 위험 신호를 보낸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아오히츠기 사마토키에게 특출난 위로의 재능 따위는 없었다. 순전히 상대가 이 남자였기 때문에 위로받았을 뿐이지. 더티독 때에도 지금도, 이래저래 말을 얹는 대신 냅다 끌어당겨 거리감을 좁히는 방식이 좋았다. 당장 싫다는 말보다는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이 나왔다는 것도.
그렇게 얼마간 끌어안고 미래를 장담하든가, 방으로 돌아가서 배틀을 준비했다면 더 아름다운 결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대신 야마다 이치로는 모르는 척 조금 더 발을 뻗어 보기로 했다. 한참 어린 것을 갸륵하게 보는 시선이 선명하다. 그것을 이용하는 건 본래 취향이 아니었으나 이 년 후의 야마다 이치로는 찬 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애초 잘 만날 수도 없는데 무슨 놈의 어른인 척, 멋있는 척을 하겠다고. 곧게 뻗은 목 위, 맥박이 뛰는 부분에 입술을 찍어 누르자 아래 깔린 몸이 일순 경직한다. 모르는 척 혀를 내어 핥고, 깨물고, 문지르다가 그대로 타고 올라가 피어스 위를 지분거린다. 계속 사마토키에게 끌어안긴 자세였으므로 쓸 수 있는 건 입뿐이었다. 귀에서 울리는 질척한 소리에 등 뒤로 두른 팔에 힘이 들어갔다가 이내 시트 위로 떨어진다.
늘어진 왼손을 바투 눌러 엄지손가락으로 슬슬 쓰다듬는다. 약지에 남은 잇자국은 조금 흐려졌으나 더듬으면 아직 느껴지는 정도였다. 치뜬 눈 위로 쪼듯이 입맞춤을 한 다음, 왼손 마디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밀어넣고는 체중을 싣는다. 오른손으로 쇄골 아래를 더듬자 남은 오른손이 제지하듯 손속을 막아섰다.
“이게 뭐 하자는 짓인데.”
“…당신이 대답을 안 해주니까, 그 대신. 몸은 솔직하잖아.”
“하아?”
“너, 나를. 그 다음은 뭐였는데?”
물어보면 답해줄 심산이었다. 좋아한다느니 사랑한다느니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니었지만. 다 알고 있는 주제에 끄트머리만 건드리고 지나가는 뒷모습을 좇는 건 지긋지긋한 일이었으므로. 당연하게도, 사마토키는 조금 전처럼 말을 아낀다. 늘상 있는 일이었으므로 상처받지는 않았지만—그런 것보다 제 몸을 챙기지 않는 게 더 싫었다— 괘씸하기는 해서 이치로가 일자로 다물린 입술 위로 이를 세웠다. 통증 때문에 벌어지는 틈을 집요하게 비집고 들어가 혀를 섞는 게 확실히 초짜는 아니었다. 대체 어느 틈에. 이 년의 간극이 낯선 건 아오히츠기 사마토키도 마찬가지였다. 내내 얼굴을 붉히고 종래에는 울먹거리던 열일곱 살짜리 남자애는 어디 가고. 눈물에 잠깐 홀린 틈을 타 잡아먹히게 생겼으나 질척한 소리에 놈의 손목을 쥐었던 오른손에 힘이 풀렸다.
더 놀라운 건 그러던 사이 제 셔츠의 단추가 온통 풀렸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위쪽 두 개는 풀어둔 채였지만 훤히 벌어진 옷깃 사이로 아랫배를 덧그리는 손에는 다분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 시발, 진즉 튈걸. 끈적한 손길로 맨살을 더듬고 혀를 섞으면 없다가도 그럴 마음이 드는 게 사내놈들이라서, 대단히 유감스러운 상황이었다. 아직은 괜찮은데, 아직은. 이놈의 혀를 물어버릴까 생각했다가 그건 아무래도 내일 랩 배틀의 중대한 패널티가 될까 봐 사람 된 도리로 참아낸다. 대신 머리라도 후려갈길 심산으로 협탁 쪽에 놓인 플라스틱 캔 커피로 손을 뻗었으나.
“아, 흣, ……미친 새끼야!”
“집중해. 당신 키스하면서 여기 만지는 거 좋아하잖아.”
납작한 유두 위를 꼬집듯 쥐었다가 다시 슬슬 퉁기는 통에 몸이 움츠러든다. 부러 눈을 뜨고 시선을 얽으며 표정을 살피는데, 제 내밀한 부분이 남의 손 안에서 짓뭉개지고 있는데도 절대로 시선을 피하지 않는 남자가 기꺼웠다. 아마 가죽이 아니라 내장이 헤집어져도 눈을 피하지 않겠지. 쓴웃음이 샜으나 점점, 눈가 아래가 붉어지는 것은 좋은 징조였다. 맞닿은 입 사이로 달뜬 호흡이 샜다. 내도록 깍지 끼고 있던 왼손에 한 번 힘을 주고는, 놓은 손으로 그대로 바지 버클을 풀어 브리프 위를 더듬는다. 완전히 커진 건 아니었으나 천 위가 빠듯하게 부풀어 젖어 있었다. 부러 그 위를 손끝으로 덧그리다가 남자의 아랫입술을 쪽 빨고 떨어진 이치로가 흐리게 웃었다.
“봐, 몸은 솔직하지.”
“별 미친, …씨발. 그렇게 더듬는데 안 서면 그건 제구실 못하는, 응…!”
욕을 처먹으면서도 기분이 좋은 게 중증이 아니면 뭘까, 하고 잠시 스스로의 성적 취향에 대해 고민하던 이치로가 브리프를 아예 끌어내렸다. 청바지도 속옷도 허벅지께에 걸쳐진 채다. 옅은 체모 위로 반쯤 선 채인 성기가 번들거렸다. 아오히츠기 사마토키가 입술을 깨문다. 깨물지 마. 속삭이곤 그 아래로 엄지를 집어넣으며 야마다 이치로가 속으로 반문한다. 글쎄, 더듬어도 진짜 싫었으면 안 서지 않았을까. 제게는 너무 허물 없이 들러붙곤 하던 남자가 다른 이들은 손끝만 닿아도 기분 나쁘다며 발길질을 하는 모습에 안심하던 기억이 선명했다.
“당신은 왜 여기까지 예쁘지….”
“징그러운 소리 좀, 으, 흣….”
질색하는 얼굴로 밀어내던 손이 다시금 시트를 짚었다. 이치로가 아래를 쥐고 흔든 탓이다. 선단에서 흐른 프리컴을 손바닥에 덧발라 느슨하게 문지르는 감각에 쾌감이 등줄기를 내달린다. 문득 아오히츠기 사마토키는 스스로 한 지도 오래되었음을 깨닫는다. 그럴 여유도 시간도 없었으므로. 그래서 평소보다 더 빨리 달아오른 거다. 그게 아니면 이렇게 빠른 사정이, 설명이 되지 않았다. 야마다 이치로가 눈을 껌뻑였다. 빠르네,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여상했다.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밭은 숨을 내쉬던 사마토키가 이를 갈다 몸을 일으켰다. 정확히는, 일으키려고 시도했다. 그대로 곧은 몸을 밀어 넘어트린 이치로가 후드를 단숨에 벗어 바닥 어드메로 팽개쳤다.
“혼자만 가고 도망치려는 건 너무하잖아.”
“네놈이 멋대로 쥐고 흔든 거잖아!”
“기분 좋았으면서.”
안 쓴 지 좀 됐나 봐? 떠보는 말투가 뾰족했다. 뭔, 지는 써본 것처럼. 어쩐지 괘씸해서 입을 다물자 정액으로 축축한 손이 아래. 그러니까, 좆보다도 더 아래. 회음부를 더듬는 손에 진심으로 위기감이 들었다. 넣을 생각인가. 설마. 진짜로? 이 새끼 야마다 이치로는 맞는 건가. 사람이 뒤바뀌었든 세뇌당했든 둘 중 하나 아니야? 애매하게 걸쳐진 데님 바지에 신축성 따위는 없어서, 허벅지를 오므리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시발, 돌아가면 저놈처럼 큰 사이즈를 사 입든 해야지.
“너 제정신이냐?”
“아마 그럴걸.”
“내일 배틀인데, 지금, 여기서, 중왕구가 내준 호텔에서 지금 이딴…. 그런 걸 하고 싶다고?”
“그러면 안 되나.”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차분했다. 동시에 제 손으로 바지 버클을 풀어 튀어나온 좆이 기억보다도 더 커서….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이 년 전과 딱 똑같은 기분이었다. 안 된다느니 싫다느니 하는 약한 소리를 내뱉는 건 딱 질색이었음에도 저것과 마주한 순간 술이 깨서. 아득해진 틈을 타 손가락 하나가 구멍 근처를 확인하듯 꾹꾹 눌렀다.
“이 미친 새끼가, 좀…!”
“…싫어?”
방금 전까지 무대뽀였던 주제에 순식간에 목소리가 시무룩해진다. 사특한 새끼. 그때도 어떻게 좀 해 달라고 눈이 그렁그렁해져서 저걸 넣었다가 다음날 몸이 반쪽으로 갈라질 뻔했던 게 생경한데, 그 짓거리를 나한테 또 하라고. 저가 깔리는 입장이 아니라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닌가. 그렇다고 반대로 제가 야마다 이치로를 눕히는 건 또 그림이 이상했다. 여섯 살 아래, 네무와 동갑. 그런 문제로 양심에 찔린다기보다도 아예 상상하기 힘든 것에 가까웠다. 진짜 싫어? 응? 사마토키…. 조르듯 뺨 위로 쪽쪽거리는 얼굴 위로 말라붙은 눈물자국이 선명했다.
그러니까 이런 것 때문에, 몸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거면 그냥 해 주고 말자고 생각하게 되는 거다.
“나가 죽어….”
내내 밀어대던 손으로 눈 위를 덮는다. 그게 남자 나름의 OK 사인임을 알고 있는 이치로가 반지를 빼 협탁 위로 던지듯 놓고는 아래를 헤집는다. 손을 끊어먹을 것처럼 조이는 아래에 머리 한구석이 뜨거워졌다. 애초에 넣으라고 만들어진 구멍도 아닌데 여기에 넣을 수 있나. 그런 생각을, 지난번에도 했었다. 인체의 신비란 위대해서 끝내는 넣을 수 있었으나. 매번 떠올리며 것보다도 실제는 더 자극적이었다. 여기 어디쯤이었는데. …손가락으로 안 닿았던가. 무언가 걸리기는 하는데, 몸이 미묘하게 움찔거리기는 해도 반응이 크질 않은 걸 보니 애매하게 닿지 않는 것 같았다.
“좁네….”
“씨발, 당연한 거 아닌, ….”
흐읏. 습한 숨이 흩뿌려진다. 손으로 가려 둔 얼굴은 이제 눈매뿐만 아니라 뺨도 온통 붉었다. 당연한 게 아니라면, 이쪽으로는 한 적 없단 소릴까. 치졸한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당신 외엔 한 적 없는데. 남자의 주위에는 늘 사람이 많았고, 여자건 남자건 할 거 없이 따르는 이들이 많았다. 목덜미와 어깻죽지가 이어지는 부분에 콱 이를 박으면서, 몸이 튀어오른 틈을 타 손가락 하나를 더 집어넣는다. 개도 아니고 왜 입질이냐는 불평보다도 감각이 거북한지 조금 시든 아래가 더 신경 쓰였다. 뭉툭한 손끝으로 빠듯한 안쪽을 더듬어 넓히는 동안 다른 손으로는 재차 선단 위를 문질렀다. 피부가 흰 탓인지 똑같이 햇빛을 쬐어도 아오히츠기 사마토키는 피부가 타기보다는 벌겋게 달아오르기만 했는데, 섹스할 때도 마찬가지로 몸 여기저기에 열감이 비친다. 그게 끝내주게 야했다.
남자의 손을 끌어다 제 아래를 쥐게 하자 복수라도 하듯 끊어먹을 것처럼 선단을 쥐는 통에 사정감을 참았다. 좀 봐주라, 진짜. 애원하는 목소리에 손가락이 느슨해진다. 남자의 허리 뒤로 쿠션을 밀어 넣고 아래를 본격적으로 헤집자 신음이 샜다. 흣, 으, 이치로…. 이 개 같은. 절반은 욕이고 절반은 채 말이 되지 못한 무언가인데 사이에 제 이름이 들어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눈앞에 전류가 튀었다. 이렇게 야해서 어떡하지. 선단에서 줄줄 흐르는 액이 아래로 고여 손이 구멍을 헤집을 때마다 쿨쩍거리는 소리가 났다. 여전히 좁았으나 아까보다는 말랑하게 풀린 채라, 모르는 척 벌어진 입 사이로 혀를 빨며 손가락의 수를 늘렸다. 세 개까지 삼킬 수 있으면 그래도, 어떻게 넣어볼 수는. 아래가 벌어지는 감각에 혀가 씹힐 뻔하기는 했으나 나름의 쾌거였다.
“시발, 언제까지, …깔짝대기만 할 건데.”
“최대한 많이 풀어주고 싶은데.”
다칠까 봐서. 길쭉한 손가락 세 개를 삼킨 구멍이 오물거린다. 낯선 감각에 불쾌감이 일면서도 아래가 쑤셨다. 애매하게 기분 좋은 부분에 닿지가 않아서 성감이 오르려다가 뚝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자니 죽을 노릇이었다. 그냥 씨발, 빨리 넣고 싸. 저놈의 것을 넣기에는 아직 한참 부족할지도 몰랐으나 일단 넣기만 하면 괜찮을 거라서. 몸이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게 무서울 정도였다. 이래서 몸정이 무서운 건가, 흐린 의식 한켠으로 생각하자 일순 멈추었던 손이 단번에 빠져나갔다. 아쉬운 듯 내벽이 쭉 딸려갔다가 제자리를 찾는다. 딱 그 부피만큼이 허전해 아래가 움찔거린다.
“당신이 넣어 달라고 한 거야.”
목소리가 제법 음험했다. 그제야 놈의 얼굴을 바라보자 눈이 새까맣게 돌아 있다. 대체 뭐에 또 제정신이 아니게 된 걸까. 제 말을 제발 넣어줘, 따위로 받아들인 걸까. 미친 오타쿠 새끼가. 허리를 아래에 맞추고 아래에 좆이 펴바르듯 문질러진다. 축축하고 둔탁한 느낌에 머리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크기를 가늠하듯 천천히 회음부에서부터 제 중심 위로 문질러지는 감각이 아득했다. 젤 같은 게 있으면 더 수월했을 텐데, 러브 호텔도 아니고. 생각하던 이치로가 문득 침음을 흘렸다. 어, 근데 미안. 콘돔이 없어. 여기서 할 생각은 없었어서…. 기묘하게 산뜻한 목소리와 동시에 아래가 서서히 벌어진다. 사마토키가 이를 악물었다. 저가 대주는 것도 아니면서, 양심도 없는 쳐죽일 놈의 애새끼를 봤나. 온갖 벌레의 이름이 떠올랐다가 스러진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끄트머리만 넣었는데도 끊어먹을 듯 조여대는 통에 야마다 이치로도 죽을 맛이었다. 잔뜩 굳은 몸 위를 더듬고 문지르고 쓰다듬으며 힘 좀 빼 보라고 애원하는 수밖에. 아주 천천히, 아오히츠기 사마토키는 호흡을 되찾았다. 반쯤 진입하는 것도 체감상 억겁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조금씩 더 밀어넣을 때마다 아직도 남았다고, 하고 사마토키는 경악했다. 이건 무언가 이상했다. 왜 이렇게 크지. 그 때랑 키는 똑같은데, 아랫도리는 더 성장할 수도 있나.
내장이 짜부라드는 듯 불쾌감이 치민다. 그런데도 몸 안쪽부터 열감이 치미는 것은 불가항력이다. 기어이 야마다 이치로가 제 것을 다 밀어넣었을 때는 둘 다 땀범벅인 채였다. 어디, 어디까지 들어온 거지. 숨이 막혀 아랫배부터 명치께까지 더듬자 안에 있는 것이 부피를 키운다. 여기서 더 커질 수 있다고? 이게 사람 새낀가. 책망하듯 눈을 뾰족하게 뜨자 입술 위를 핥는다. 무언가가 잘못 프로그래밍된 것처럼 이렇게까지 발정하는 게, 도무지 이유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제 것을 삼킨 구멍의 벌어진 주름을 손끝으로 헤아리던 이치로가 기분 좋게 웃었다. 보여? 다 들어갔어. 목소리에도 온도가 있다면, 놈의 것은 지금 120도일 터였다.
“…움직일게, 사마토키.”
“안, 잠깐, …씨발 내가 잠깐이라고, 흐으…!”
이치로가 허리를 처박았다. 원체 큰 탓에 실은 다 넣었을 때부터 안쪽 어딘가 눌린 채였는데, 허리를 빼냈다가 짓찧듯 밀어넣으니 감당할 도리가 없었다. 말랑한 내벽이 아래를 콱 조여 이치로가 이를 사리물었다. 갈 뻔했네. 그래도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지는 알았다. 어느 쪽으로든 느끼기는 하는 것 같았지만.
끝까지 넣는 지난한 과정에 조금 시들었던 아랫도리가 금세 배 위로 올라붙는다. 야쿠자 주제에, 앞을 만져주지 않았는데도 좆을 세우다니. 너무 야한 거 아닌가. 느릿하던 박자감이 조금씩 빨라졌다. 흰 손등 위로 푸르게 핏줄이 돋고 발끝이 곱았다. 흐물거리는 머리 한쪽으로는 이 남자가 사랑스럽다는 생각뿐이라, 허릿짓을 하면서도 뺨이며 눈꺼풀 위로 입술을 부딪혔다. 그러자 목 뒤로 팔이 걸려 저를 끌어내린다. 제대로 혀를 섞을 정신도 없으면서 키스를 조르는 게 아무래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은데, 기꺼이 응하는 것도 연하의 미덕이라. 혀를 빠는 것은 느릿한데 아래를 처박는 속도는 점점 빨라져 사마토키의 몸이 점점 위로 밀렸다.
복상사로 죽으면 행복할지도. 시답잖은 중얼거림에 황당하다는 듯한 시선이 매섭게 꽂힌다. 자극이 지나쳐 넣자마자 싸던 새끼는 어디 가고 남은 것은 징그럽게도 잘 큰 무언가였다. 제가 제 손으로 밥 먹이고 야한 짓까지 알려주며 키우다가 내다버린 애새끼. 그러나 정말로 슬슬 한계였다. 신음이 마구잡이로 새는데 소리가 멀었다. 눈앞에서 섬광이 터지다가 이내 점멸한다. 원래도 조이던 내벽이 경련하듯 아래를 잡아챘다.
아오히츠기 사마토키의 몸이 덜덜 떨리다가 이내 축 늘어진다. 동시에 아래로 뭉근한 것이 흘렀다. 동시에 맞은 절정 끝에 이치로가 사마토키의 위로 쓰러지듯 체중을 실었다. 맞닿은 가슴이 크게 부풀다가 꺼지기를 반복한다. 이인 삼각 경기라도 뛴 것처럼 호흡이 가빴다.
“비켜, 새끼야…. 무거워.”
“잠깐만…. 조금만 이러고 있을게.”
좆이나 빼라고 하고 싶었으나 그럴 힘도 없어서 사마토키가 눈을 감았다. 완전히 이 자식한테 말렸다. 이쯤 되면 아까 울어제낀 것도 제 한 줌 양심에 기대 연기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래가 얼얼했다. 얼마간 더 숨을 고르다 이치로가 제 것을 빼내자 구멍에서 왈칵 정액이 흘러나왔다. 그를 보고 또 발기한 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사마토키는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금수새끼지 저게…. 혀를 차자 시선을 피한다.
“…뒤로 가는 건 오랜만이야?”
말이 떨어지자마자 매서운 발길질이 날아와 이치로가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일을 치르는 동안 허벅지께에 걸쳐져 있던 바지와 속옷이 벗겨져 침대 아래로 떨어진 채고, 야마다 이치로 군이 정사 뒤 여운에 취해 방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뭐가 또 마음에 안 들었는데. 볼멘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키자 분이 안 풀리는 듯 다른 쪽 발도 내뻗는다. 아무래도 허리가 아픈지 이번에는 금방 내려두었지만.
“너는 씨발, 대체 이 몸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데?”
“야쿠자…. 음, 뭐라고 딱 떨어지게는 설명 못 하겠는데.”
“말고. 내가 그렇게 문란한 이미지냐?”
솔직히는, 좀. 다시 얻어맞을까 봐 면전에 대고 내뱉지는 못했다. 그러나 어쩐지 억울해 보이는 사마토키가 남에게 아래를 시발 왜 대줘야 하냐느니, 너 정도 크기 아니면 뒤로 느끼지도 못할 거라느니, 이 몸은 이 년 동안 요코하마에서 체계를 잡으려고 바빠 뒤지겠는데 막상 예전에 비해서 발랑 까진 건 야마다 이치로 군 이 개 같은 새끼라느니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아래가 빠듯해지는 것도 사실이라. 한번 더 해도 돼? 하는 대사는 참지 못한 이치로에게 이번에는 발 대신 주먹이 날아들었다. 저도 이 년 동안 요로즈야 야마다 일이 끝없이 밀려들어 바빴고, 맹세코 아래를 쓴 건 당신을 반찬 삼아 뺀 것밖에 없다는 항변 끝에 간신히 다시 끌어안기는 성공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있잖아, 사마토키. 아까 말했던 건 정말 약속할 마음 없어?”
“안 한다고 했지. 애초에 왜 내가 내 몸을 남한테 주니 마니 해야 하는데.”
글쎄, 이 몸을 꿰뚫은 게 야마다 이치로 저뿐이라면 이미 반쯤은 가진 것 아닌가. 머리 한쪽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닌 척 슬슬 허리께를 주물렀다. 아오히츠기 사마토키가 앓는 소리를 낸다. 왜 여기엔 사우나가 딸려 있지 않은 거지. 근육 푸는 데는 직빵인데. 료칸도 아니고 바라는 게 너무 많긴 하지만, 애초에 랩 배틀 참가자가 섹스한 게 잘못이기는 하지만. …근데 그걸 나랑 이 사람이, 배틀 전날. 진짜 실환가…. 머리 한쪽이 달아올라 붕 뜬 기분으로 여기저기를 지분거리며 다시 한 번 운을 띄웠다.
“…그럼 내일 버스터 브로즈가 우승하면 나한테 줘.”
“하? 이게 미쳤나. 이 몸이, 요코하마가 질 것 같아?”
“우리도 질 생각 없거든. 진심으로 할 거니까.”
“까불지 말고.”
“질까봐 걱정되나 보지.”
“…배틀 전에 죽여버리는 수가 있어.”
잠깐 느슨해졌던 공기가 다시 팽팽하게 움직인다. 목이 잠긴 탓에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평소보다도 듣기 좋았다. 나도 이 남자도 누군가에게 져줄 생각 따위는 없다. 만의 하나, 라는 가정 같은 건 달지 않는 점이 또 둘답다. 그렇게 태어나고 자란 존재들이었다. 내가 해야만 한다고.
그래도 야마다 이치로는 머릿속으로 계약서 한 장을 꺼낸다. 해결사와 야쿠자가 닮은 부분이 있다면 생각보다 서류로 처리해야 할 일이 많다는 거였다. 뭐, 사마토키 본인이 들여다보는 일이야 잘 없고 아랫사람이 어련히 꼼꼼하게 체크하겠지만 양식 자체는 익숙할 터다. 요로즈야 야마다도 따로 대리인을 두고는 있으나 이치로가 한 번씩은 확인하는 편이다. —갑은 을에게 배틀 내용에 따라 왼손 약지 정도는 양보할 것을 맹세한다, 이런 문장 정도면 되려나. 남자가 길길이 날뛸 수 있으니 편면적 강행규정대로 따르라는 조항을 넣는 것이 좋겠다. 아오히츠기 사마토키가 갑, 야마다 이치로가 을. 더 좋아하는 쪽이 지는 장사였으니.
저기서 나고야의 변호사, 아마구니 히토야가 듣는다면 그딴 식으로 쓰는 거 아니라고 뒷목을 잡을 상상을 하며 이치로는 웃었다. 안 그래도 이길 계획이었으나 최선을 다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쌓였으니 질 이유가 없었다.
그럼 사마토키, 담배는 지금 걸 계속 피우면 안 돼? 이게 뭔 줄 알고, 흡연자도 아닌 게. 별 그려진 거잖아. …네놈이 그걸 어떻게 아는데? 향이 다르다고, 향이. 싫어. 요 앞 편의점에서 그게 똑 떨어졌대서 어쩔 수 없이 사 온 거라고. 당신한테는 이게 더 어울리는데. 까불지 말라고 했지. 그 정돈 해줄 수 있잖아. 그게 부탁하는 놈 자세냐? 씨부터 붙이라고.
*
형제들을 껴안고 무대 한켠에 드러눕는다. 숨이 턱끝까지 찼으나 고양감에 그런 것쯤 신경도 쓰이질 않았다. 랩은 즐거운 것. 말이 갖는 힘은 서로를 상처입히는 데에만 국한되지 않는 것. 그리고 그를 관철하려면, 야마다 이치로 혼자만의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했다. 아오히츠기 사마토키의 이름을 제일 먼저 부른 것은 일종의 고백이었고…. 그 이름 뒤에 붙은 것은 계약 조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