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미 2025-09-22 12:26
이치로 파라다이스




덥다.

여름이 끝나간다지만, 아직은 등에 닿는 바람이 더운 날씨였다. 그런 날에 인형탈을 뒤집어쓰고 있자니 딱 죽을 맛이라 이치로는 드물게도 의뢰를 받은 걸 후회했다. 그렇다고 이런 힘든 일을 지로나 사부로에게 시키는 건 더 안 될 말이었지만. 좋아하는 사람한테 데이트 신청을 OK받았다며, 대타를 뛰어달라고 사정사정하던 동창생의 얼굴을 떠올리며 야마다 이치로는 주먹을 쥐었다. 이건 진짜, 잘 됐다고 하면 1.5배는 받아야겠다. 얄미우니까. 다행인 건 평일의 한가운데라 사람이 비교적 적다는 것뿐이었다. 여기서 사람까지 치일 정도로 많았다면 2배, 아니 3배는 받았어야 할 터였다.

복슬거리는 탈을 비뚜름하게 들어올리고 구석에서 목을 축이던 이치로의 뒤에서 스태프가 말을 건넨다.


“치로— 여기 사진 좀 찍어줘.”


야마다 이치로가 돌아본다. 개장한 지 얼마 안 된 이 놀이공원, 치로 파라다이스는 얄궂게도 무려 마스코트의 이름이 ‘치로’였다. 들을 때마다 움찔하던 것도 세 시간쯤 지나니 조금 익숙해진 것도 같았다. 마스코트는 얼굴을 보여도, 목소리를 내어도 안 된다. 놀이공원의 불문율을 지키기 위해서 후다닥 탈을 도로 내리고 시선을 옮긴 끝에, 이치로는 도망치고 싶어졌다. 그야 시선 끝에 놓인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죽어도 놀이공원이나 테마파크 같은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남자다. 그것도 웬 어린애 손을 잡고 있는 채로.

다소 바보같이 생긴 검은 털옷 위로 앙증맞은 고양이 귀와 새빨간 머플러까지, 185cm의 몸에 얹기에는 모든 게 너무 귀여웠다. 그런 걸 뒤집어쓰고 있으므로 당연하게도 저 남자, 아오히츠기 사마토키는 안에 든 게 이치로라는 건 모를 것이다. 그럼에도 눈이 마주치자 불가항력으로 몸이 홱 돌아간다. 단전에서부터 치밀어오르는 거부감이었다. 스태프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일은 일이다. 그래, 사진만 찍어주고 다른 구역으로 이동하자. 그러면 된다.


“…치로?”


각오를 마치고 돌아보자 낮은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제 이름이 아닌데도 이름 중 두 음절이나 차지하고 있는 탓에 어쩐지 속이 간질거렸다. 인형탈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내듯 쏘아보는 시선이 새삼스러웠다. 마주하고 있는데도 바로 시비를 걸어오지 않는 남자라니. 늦은 오후의 햇살이 닿은 탓에 볼의 윤곽이 조금 부드러웠다. 드물게도 아무것도 물려있지 않은 입술이 달싹거린다. 푹푹 찌는 인형탈 안에서, 그런 것을 관찰하고 있노라니 어쩐지 긴장이 되어서….


“짜증나는 이름이군.”


사마토키의 입술이 비틀린다. 동시에 맥이 빠졌다. 마주하고 있는데도 바로 시비를 걸어오지 않는다는 부분은 취소하기로 하자. 그러나 의외인 전개는 곁에 선 아이가 손바닥으로 아오히츠기 사마토키의 다리를 콱 찍었다는 점이리라. 누굴까, 저 애는. 네다섯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는 참 동글거리는 생김새였다. 사마토키가 성인이 되자마자 태어났다면 저 정도일까. 남자와는 전혀 닮지 않았지만.


“귀여운데 왜에 그런 말을 해. 삼촌은 바보야!”


삼촌? 반사적으로 떠올린 것은 저와 동갑인, 남자가 애지중지하는 여동생의 이름이다. 그럴 리가 없는 데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불경해 바로 그만두었지만. 그렇다면 저 호칭은 누구의 것일까. MCD의 동료들이거나 카텐구미의 인연일지도. 그 악력은 앙증맞을지라도 냅다 후려맞은 것치고는 상냥한 표정으로, 남자는 혀를 차고 제게 손짓했다. 어이, 사진. …내키지 않았으나 야마다 이치로는 프로페셔널하게도 아이 옆에 가 섰다. 자연스럽게 손을 놓고 옆으로 빠지려는 사마토키를 고사리같은 손이 야무지게 붙잡는다.


“혼자 찍으면 되잖아.”
“같이 찍을래.”
“…나는 치로인지 뭔지, 이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래두, 애들한테 삼촌이랑 같이 놀이동산 왔다고 자랑하고 싶고.”
“관둬라…. 귀찮아진다.”
“아니이, 큰집 말고 유치원 같은 반 친구들.”
“나랑 여기 온 게 유치원 친구들한테 자랑거리가 되나. 누군지 모르는 거 아냐?”


삼촌은 예쁘잖아! 카랑카랑하게 울리는 말에 남자가 오 초쯤 굳어 있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는다. 분위기가 한결 풀어져서 이치로도 그제야 어깨에서 힘을 풀었다. 야마다 이치로도 마찬가지였지만, 아오히츠기 사마토키는 예나 지금이나 아이에게는 정말로 무른 사람이다. 가볍게 아이를 안아든 남자가 이치로의 곁에 섰다. 투박하고 둥그런 고양이 발바닥 장갑을 아이에게 잡힌 채로, 이치로는 처음으로 털옷을 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표정관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 건 꽤 편리한 일이었다.


“자, 치—즈.”


스태프가 휴대폰을 넘겨받고는 가로세로로 사진 몇 장을 찍는다. 그 사이 여러 가지 귀여운 포즈를 취하던 이치로는 조금 기진맥진해졌고, 사마토키가 사진을 확인하던 사이 몰래 다른 구역으로 튀려다가 꼬리를 덜컥 잡히고 말았다. 뿌리칠래야 뿌리칠 수 없는 가벼운 무게감이 등 뒤로 달랑거리며 따라붙는다.


“벌써 가려구?”


내려다보자 아이의 애절한 얼굴이 보였다. 이치로가 꼬리에 들러붙은 작은 손 위로 고양이 발을 올리고 고개를 젓는다. 일련의 모든 과정은 아주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이루어졌다. 어이, 모모. 그 녀석도 일하는 중인데 귀찮게 하면 안 되지. 새삼스럽게도 보호자 같은 대사가 퍽 잘 어울려서 이치로가 사마토키의 낯을 바라본다. 아마 저런 식으로 네무를 돌봤으리라. 사마토키가 말리자 그치마안, 하고 동그란 얼굴이 대번에 시무룩해진다.


“하하, 오늘은 한산해서 조금쯤은 괜찮을 것 같은데요.”


음?
어이, 무슨 소릴 하는 건데? 고양이 탈이 스태프 쪽으로 홱 돌아간다. 이치로 본인이 눈을 부라린다면 눈을 내리깔았겠지만, 그래 봐야 고양이 캐릭터라 아무 위협도 되지 않아서 스태프가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간다.


“우리 치로파라의 철칙은 방문해주신 분들 모두를 웃는 얼굴로 만드는 거니까요. 꼬마 아가씨가 만족할 때까지 어울려 주는 것도 괜찮겠죠? 중간에 사진 요청을 받거나, 다른 급한 일이 생기면 복귀하는 걸로 해 두면 되니까.”


모두를 웃는 얼굴로 만들겠다니, 어디 오사카에 사는 게닌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오너도 아니고 직원인데 너무 직업 정신이 투철한 거 아니냐는 소리를 마음속으로 비명처럼 내뱉으며 이치로가 삐걱삐걱 고개를 젓는다. 그 미미한 반항은 대번에 표정이 훤해진 여자아이와 그럼 부탁 좀 할까, 하고 중얼거리기 시작한 사마토키 앞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다시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아니, 진짜로? 이건 아니지……. 신나서 폴짝거리는 아이를 내려다보던 사마토키가 인형 목 즈음에 애매하게 둘러진 머플러를 콱 잡아당겼다. 그리고 고양이 귀 부분에 대고 속삭인다.


“어이, 장단 좀 맞춰. 저 녀석 오늘 생일이니까. …허튼 생각 하면 죽여버린다? 아무렴 애를 싫어하는 새끼가 이런 데서 탈을 뒤집어쓰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낮게 까라진 목소리가 속사포처럼 귀에 꽂힌다. 끝까지 잘 해내면 이쪽에서도 보수를 좀 챙겨주지, 하는 멘트는 좀 야쿠자답기도 했다. 그보다 저 남자는 인형 귀 쪽에 사람 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틀림없는 바보다…. 아오히츠기 사마토키만 있었다면 그대로 이 고양이 대가리를 벗어던졌을 텐데. 그런 딴죽을 걸래야 걸 수 없는 상태의 이치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참 운 없는 하루였다.



*



기묘하게도 미인인 야쿠자 하나, 동그랗고 작은 어린이, 그리고 야쿠자만큼 길쭉한 키의 고양이 마스코트의 조합은 아무래도 눈에 띈다. 그야말로 유원지이기 때문에 가능한 구성이기는 했으나, 인파 사이로 혹시 요코하마 디비전의 아오히츠기 사마토키 아니냐는 수근거림을 한 귀로 흘리며 이치로는 터벅터벅 걸었다. 심지어 작은 실랑이 끝에 사마토키는 검은 고양이 머리띠와 앙증맞은 천사 날개가 달린 가방, 고양이 모양의 뚜껑이 달린 팝콘통까지 목에 건 채였다. 이건 어린이에게 약한 걸 넘어서 그냥 사람이 부탁에 약한 거라고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내심 그 질린 낯빛이 고소해서 좀전의 억울함이 조금 풀린 기분이었다.

아이—모모카라는 이름이었다.—는 그맘때 여느 어린이가 그렇듯 쉴새없이 종알거렸다. 휙휙 바뀌는 주제에 사마토키가 간간이 대꾸해 주는 것으로 대화가 이어진다. 그로 미루어 보건대 모모카의 아버지가 카텐구미의 조직원 중 한 명이고, 오늘은 아이의 생일이라 이 신상 놀이공원의 티켓을 미리 예약해 두었다고 한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꼭 행복한 생일을 만들어 주겠다며 미리 일을 빼 두었지만 결국 생겨버린 것이다. 목에 칼이 들어오는 어른의 사정이.

때문에 늘 그런 흐름이듯 카텐구미의 두목이 사마토키를 지목했고, 여동생을 열아홉까지 키워낸 남자는 마침 비번이었던 죄로 모모카의 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달려오기 전까지 여기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게 왜 꼭 오늘이어야만 했는지, 야마다 이치로는 운명론자는 아니었지만 퍽 기구하다는 생각만은 들었다. 회전목마 줄 끝으로 서자 주위 어린이들의 손길이 한번씩 날아들었다. 마스코트와의 동행 십 분만에 그 취급이 익숙해진 두 사람은 뒤에서 이치로가 떡 주물리듯 쓰다듬어지는 건 신경쓰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유치원에서, 소마가 나중에 커서 결혼하자고 했는데….”
“하아?”


너무 빠르지 않나. 동생 키우는 장남들이 으레 그렇듯 두 사람은 단번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사실 연애라는 주제는 늘 흥미롭긴 했다. 그게 아이들 사이의 대화라면 더 그랬고. 그 소마라는 건 어떤 놈인데? 사마토키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어이, 본인 여동생도 아닌데 너무 그렇게 빡빡하게 굴지 말라고. 아오히츠기 네무도 참 고생이었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지로나 사부로가 연애를 시작한다면, 결혼해서 분가한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론 진지하게 고민해본 전적이 있는 이치로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으음, 나쁜 애는 아닌데.”
“결혼 얘기가 나올 거면 나쁘지 않은 정도론 부족하지. 최고로 좋은 사람을 만나야 돼.”
“사마토키 삼촌처럼?”
“…뭐어.”


부정 안 하는 거냐. 고양이 탈 안으로 잔뜩 정색하며 남자를 바라보았지만 아무래도 제 의중은 전해지지 않는 듯 싶었다. 아오히츠기 사마토키야말로 결혼 상대로는 최악이었다. 골초에, 술도 많이 마시고, 늘상 싸움질에 일단 야쿠자 부두목이라는 커다란 직업적 흠결이 있고, 그런 주제에 얼굴은 예뻐서 사람들이 자주 꼬인다. 그래도,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 덧붙이며 사마토키의 손이 모모카의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그치만 남자는 얼굴이 제일이랬는걸.”
“…대체 누가 그런 소릴 했는데?”
“우리 엄마가!”
“그런 것치곤 아오자키 그 놈은, …아니 됐다.”


산도적 같은 조직원을 떠올리던 사마토키가 말을 줄였다. 그런 얼굴이 취향인 사람도 있는 법이겠지, 하고 중얼거리는 건 분명 모모카를 위해서다. 그러거나 말거나 방글거리는 아이는 예의 소마에 대해 이것저것 정보값을 흩뿌렸다. 키는 나보다 조금 작구, 달리기도 나보다 못 하구, 힘도 내가 더 센 것 같은데…. 그런데 엄청 착하고, 귀여워. 꼭 강아지 같아! 칭찬인지 아닌지 애매모호한 이야기지만 어쨌든 그 애가 퍽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아이들의 눈은 신랄하구나. 그래도 지로나 사부로는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자랑스러운 동생들이니까, 응.


“다음에 한 번 데려와. 어느 정도로 괜찮은 재목인지 이 몸이 평가해 줄 테니까.”
“으응. 사마토키 삼촌은 결혼하자고 해주는 사람 있어?”


잠시 공기가 멈춘다. 가만히 서 있는데도 스텝이 꼬일 것 같아서 이치로는 곁의 바를 붙잡고 섰다. 붙잡은 것보다도 손을 올린 것 뿐이었지만. 야마다 이치로가 알기로는 생각할 거리도 없을 터인데, 기묘하게 뜸을 들이던 사마토키의 입이 드디어 열린다.


“없어.”
“왜?”
“왜냐니, 없으니까 없지. 그런 소리 듣기엔 아직 나이를 덜 먹기도 했고….”
“그럼, 음, 나중에 모모랑 결혼하면 안 돼?”
“너 좀전까진 소마 얘기만 했잖아.”


하여튼 웃긴 꼬맹이. 이건 소마에 대한 배신이야. 진짜인데, 하고 볼을 부풀리는 아이는 금세 타겟을 바꿨다.


“그럼, 치로는 좋아하는 사람 있어?”


저건 야마다 이치로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놀이공원 마스코트에게 묻는 말이겠지. 고민하던 이치로가 한 템포 쉬고 고개를 끄덕인다. 옆에서 사마토키가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모모카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진짜? 어디? 누군데? 같은 고양이야? 질문 세례에 다시 한 번 끄덕이고는, 어트랙션 근처에 있는 팜플렛을 꼬깃꼬깃 펼쳐 제일 뒷페이지를 보여주었다. 물음표 모양이 박힌 검은색 고양이 실루엣 아래 대문짝만하게 신 캐릭터라고 쓰여 있다. 이게 ‘치로’의 여자친구라는 설정인지는 모르겠으나, 리본도 달려 있는 걸 봐서는 맞겠지. 놀이공원의 캐릭터 사업이라는 건 대강 그렇게 돌아가는 법이니까.


“다음, 으응…. 다음 달에 나온다고 써 있는 거 맞지?”
“그래.”
“우리 다음 달에도 오자!”


삐뚤빼뚤 한자를 읽어 낸 모모카를 기특하다는 듯 바라보던 사마토키가 봐서, 하고 애매한 대답을 뱉는다. 비슷한 식의 시덥잖은 대화 끝에 곧 둘의 차례가 되었고, 야마다 이치로는 자연히 라인을 넘어 탈선했다. 재차 꼬리가 붙들렸으나 이번에는 몸이 휘청거릴 만큼 강한 악력이었다. 황당한 얼굴로 뒤를 돌자 손을 뻗은 것은 사마토키다.


“네놈은 안 타냐?”


탈 안으로 입만 뻐끔거리던 이치로가 둥그런 손으로 아래를 가리킨다. 귀여움을 강조하기 위해 짧뚱하게 제작된 다리는 아무리 봐도 회전목마 위로 올라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누군가 들어 올려준대도 미끄러질 것 같달까. 손을 따라 시선을 내리던 사마토키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아, 소리를 냈다. 이내 픽 웃고 쥐여주는 건 카메라 어플을 켠 채인 남자의 휴대폰이다. …이대로 들고 달아나 버릴까. 이런 차림으로는 금세 잡히겠지만.

삐딱선을 타는 생각과는 반대로 착실하게 피사체를 카메라 안에 가뒀다. 모모카를 훌쩍 안아들고 검은색 말 위에 올라탄 남자는 소위 말해 ‘그림이 됐다.’ 놀이기구가 운행을 시작하자 부드러운 멜로디가 흐른다. 아이가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대수롭지 않은 듯 사마토키가 그에 답한다. 그러면 아이는 꺄르르 웃음을 터트리고 그것이 전염되기라도 한 듯 남자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번쩍거리는 회전목마 장식의 빛이 볕을 받아 사마토키의 뺨 위에서 부서진다. 그 모든 풍경이 비현실적이게 평화로워 이치로는 숨을 들이켰다. 셔터를 누른 것은 조건반사다.

동영상 두어 개, 함께 나온 사진 여러 장. 그 사이로 예쁘게도 웃고 있는, 사마토키에게 초점이 간 사진을 어떻게 할까 들여다보다가 이치로는 삭제 버튼을 눌렀다. 지나치게 내밀하다. 이런 걸 보여줄 수는 없었다. 사진을 내민다면 아마 그 남자 성격에 옷가죽을 벗기고도 남겠지. 갤러리 위로 정체불명의 사진들을 모르는 척하며 대강 정리를 마치고 나자 눈앞으로 흰 손이 뻗어 온다. 그 위로 얌전히 핸드폰을 올렸다. 사진을 확인하던 사마토키가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만족한 듯 했다.


“다음은 저거 타러 가자!”


아이가 사마토키의 손을 잡아 끈다. 아이에게 붙들린 남자는 또 반사적으로 제 목덜미를 낚아챈다. 질질 끌려가며 이치로는, 살면서 남의 아버지가 이렇게 보고 싶기는 또 처음이었다.



*



회전컵, 범퍼카, 어린이용 바이킹이며 체험형 어트랙션까지 돌고 나니 정말로 쓰러질 것 같았다. 아오히츠기 사마토키는 지쳤다기보다도 담배가 당기는 것 같았으나. 오래 걸은 여파로 남자에게 안겨 꼬닥꼬닥 졸고 있던 모모카는 정문으로 데리러 온 아버지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트렸다. 씩씩하고 즐겁게 잘 놀았지만서도, 약속을 지키지 않은 부모에게는 역시 서러움이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딱 야쿠자 산적처럼 생긴 조직원이 사마토키를 보자마자 등을 반으로 접었다가, 이내 우는 아이를 달래려 절절매는 것은 꽤나 신기한 광경이었다. 등 뒤에서 아이가 가지고 싶다고 했던 핑크빛 장난감을 잔뜩 꺼낸 뒤에야 울음을 그친 아이는 집에서 엄마가 초콜릿 케이크를 만들어 둔 채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야 웃음을 되찾았다. 인형과 머리띠, 장난감, 헬륨이 든 풍선까지 야무지게 품에 안고서 모모카가 손을 흔든다.


“또 놀아, 사마토키 삼촌!”
“오냐.”
“욘석. 감사합니다, 해야지.”
“감사합니다아—”


그리하여 석양을 등진 채 남은 것은 아오히츠기 사마토키와 기절하기 일보직전인 야마다 이치로다. 근무시간은 아슬아슬하게 세이프였으나 이건 명백히 초과 근무 아닌가. 역시 의뢰비를 세 배는 받아야겠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가라아게를 잔뜩 사서, 어제 남은 카레에 얹어 먹자. 카레 반 고기 반이라는 어마무시한 짓을 벌여 주겠다고 생각하며, 이치로가 기운 빠진 동작으로 사마토키에게 고개를 까닥거리곤 뒤돌아 걷는다. 익숙한 반동이 느껴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꼬리가 잡히는 것은 벌써 세 번째였다.


“흡연 구역.”
“…….”
“안내해.”


낯빛이 질린 게 어지간히도 참고 있었던 듯 해서, 이치로가 잠자코 손을 뻗어 왼쪽을 가리킨다. 주차장 근처에 작은 흡연 부스가 있었다. 같은 곳을 발견한 듯 아오히츠기 사마토키가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다. 이제 진짜 좀, 헤어지자고. 하루가 너무 길었다. 그러나 털옷의 꼬리를 붙든 손은 여전했고, 그 상태로 다리를 내뻗자 몸이 휘청하고 흔들린다. 남자의 손 위로 장갑을 올리자 뻔뻔하게도 빨리 안 움직이고 뭐하냐는 호통이 떨어졌다.

역시 처음에, 그러니까 사진을 요청받았을 때에 털옷을 집어던졌어야 하는데. 아르바이트 대타 주제에 어린이의 꿈과 희망을 지켜줘야겠다는 마음 같은 건 품지 말고. 모모카라는 이름의 어린이를 떠올리면 그 부분은 별로 후회스럽지 않으나…. 서너 시간을 함께 다니다 사실 내가 야마다 이치로였습니다, 짜잔. 하는 건 너무 모양빠지지 않은가. 위선자에 기만자 타이틀까지 추가되게 생겼으니까. 도착하자마자 남자가 담배에 불을 붙인다. 아무리 그래도 놀이공원에서까지 불을 붙여줄 사람을 구하기는 쉽지 않아 보였는지 제대로 라이터를 들고 있는 게 신선했다.

저 좁은 흡연 부스 안에 물리적으로 들어가지도 못하는 상태에, 털에 냄새라도 배면 큰일이라는 이유로 비껴 섰으나 사마토키가 멀리 떨어지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유리벽 하나를 마주 두고 문은 열어둔 채 고양이 탈의 끄트머리만 잡혀 있다니 아이러니했다. 이거 누가 사진이라도 찍으면 NG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하면서도, 당장 주변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볼이 패일 정도로 깊게 빨아들였다가 뱉는 얼굴이 우스울 만큼 기분 좋아 보인다. 뒈지는 줄 알았네,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퍽 진심처럼 들려서 이치로가 웃음을 삼켰다.


“뭘 웃어.”


…투시 능력이라도 있는 건가. 안 보일 텐데? 삐딱한 말에 웃음기를 지우고 고개를 젓자 사마토키가 코웃음을 친다. 몇 모금을 더 빨아들이자 금세 끄트머리만 남은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남자가 성큼성큼 부스 너머로 걸어 나왔다.


“보수 이야기를 하려고 붙들어 놨는데.”
“……..”
“이제 근무 끝난 거 아닌가? 말 좀 해 보지.”


다시 한 번 인형 탈이 좌우로 흔들린다. 음성 변조를 할 수도 없고, 아오히츠기 사마토키를 상대로는 한 음절만 내뱉어도 들킬 게 빤해서 곤란했다. 보수는 무슨 보수. 그냥 보내 주지, 쓸데없이 의리를 중요시하는 야쿠자 같으니라고. 눈이 가늘어진 남자가 얼굴을 인형탈 바로 앞까지 들이밀었다. 숨소리가 들릴까 봐서 이를 악문다. 한 꺼풀 얇은 천으로 가로막힌 시야 너머가 온통 새하얬다. 다행스럽게도, 이치로가 넘어지기 전에 몸을 물린 사마토키가 제 휴대폰을 꺼내더니 잠금을 풀었다.


“닥치고 있을 거면 고개라도 움직여 봐. 보수로는 역시 돈이 좋은가?”


절레절레. 제일 깔끔하겠지만 찝찝하다. 초과분은 동창에게 받으면 족했다.


“정직원으로 신분 상승은?”


절레절레. 번듯한 해결사 사무실을 두고 놀이공원으로 근무지 변경이라니 어불성설이었다.


“…욕심이 없네, 치로 군은.”


애를 다루듯 길게 늘어지는 말투 끝으로, 사마토키가 액정을 들여다본다. 그러니까 그냥 보내 주면 되잖아. 혀끝까지 튀어나오려는 말을 참고 있자 아주 작게, 털옷 안쪽으로 벨소리가 울렸다. 반사적으로 몸이 굳는다. 그런 이치로의 반응을 가늠이라도 하듯 시선을 두던 남자가 턱짓했다.


“꺼내보지 그래.”


목덜미로 식은땀이 흐른다. 사이로 손을 넣어 잡힌 휴대폰을 확인하자 액정에 떠 있는 것은 아오히츠기 사마토키의 이름이다. …들켰다. 동시에 시야가 밝아진다. 내도록 쓰고 있던 탈이 바닥으로 데구르르 굴렀다. 조금 선선해진 초저녁의 공기가 닿자 살 것 같았고, 동시에 엉망진창인 꼴을 다른 누구도 아닌 사마토키에게 보이는 것이 최악이라 죽고 싶었다. 꽉 감았던 눈을 뜨자 남자는 어쩐지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뭐야, 네놈. 죽는 거 아냐?”


얼굴이 새빨간데. 그야 당신이 이 더운 날 저 좋을 대로 끌고 다녔으니 당연하지 않느냐고 발끈하려던 걸 참아 넘기고, 이마로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고양이 손으로 헤집어 뒤로 넘겼다. 땀냄새가 날 게 뻔해서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는 것도 잊지 않고.


“언제부터 알았는데.”
“사진 찍었을 때부터.”
“뭐? 거짓말 아냐?”
“그딴 걸로 거짓말을 왜 치는데.”


그럼 어떻게 알았는데. 의기소침한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자니 그냥, 하는 답이 돌아온다. 생긴 것만큼 예민하지는 않은 남자는 이상한 부분에서 날카로운 구석이 있었다. 정말 어떻게 알아차린 걸까.


“냄새가….”
“뭐? 여섯 시간 동안 털옷 속에 갇혀 있어 봐, 당신도.”
“…왜 발끈하고 지랄이야?”
“나도 안다고. 그러니까 보수고 뭐고 얼른 집에 가고 싶었는데, 계속 붙들어 둔 건 사마토키잖아.”
“네놈한테 지금 땀내 난다는 소리가 아니라, 사진 찍을 때 냄새로 알아차렸다고.”


말을 끝까지 들으면 어디가 덧나나, 어린 놈의 자식이. 인상을 쓰고 주워뱉는 말이 오히려 더 이해가 가지 않아서 이치로가 눈을 깜빡였다. 향이라고 하는 건, 그러니까…. 사람마다 체취가 있음은 안다. 사마토키의 경우에는 깨나 다채로운 향이 났다. 향수에, 담배에, 만취한 날이면 술 냄새까지. 본인이 타고난 향은 제법 옅었으나 뿌리고 다니는 게 화려해서 지나가면 기민하게 알아챌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야마다 이치로는 어떤가. 깨끗하게 씻고 다니기는 하지만 따로 챙겨 뿌리는 향수도, 브랜드를 따져 바디제품을 쓰는 편도 아니었다. 끽해야 선물이 들어오면 써보는 정도일까. 그런데 무슨 냄새? 이쯤 되면 털옷에서 나는 꿉꿉한 냄새가 제 향이라고 생각한 건 아닌지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자 남자가 겸연쩍은 듯 뒷머리를 털었다.


“아무튼, 어디까지 하나 보자 싶었는데 끝까지 입 다물고 장단 맞춰줄 줄은 몰랐거든. 나도.”
“…애 앞이니까.”
“그럴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해결사 일이냐?”
“아르바이트 대타.”


대화가 끊긴다. 굴러다니던 탈을 주워든 이치로가 한숨을 쉬었다. 남자에게서는 매캐한 향이 났다. 2년 전 놀이공원에서 마주쳤을 때 두르던 향과는 미묘하게 차이가 있는, 다른 종류의 담배 향이다.


“…진짜 간다.”
“뭐 바라는 거 없냐니까.”


뒷통수로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처음엔 좀 괘씸했는데 이쯤 와서는 진짜 좀 갸륵하기도 하거든. 대답 없이 뒤뚱뒤뚱 발을 옮기다, 머리통 없이 이러고 다니는 걸 관람객들에게 보이는 것도 좀 웃길 것 같아서 고양이 대가리를 다시 뒤집어썼다. 뒤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쓸데없이 성실한 새끼….

손에 쥔 휴대폰에서 이번에는 짧은 송신음이 울렸다. 굳은 손으로 화면을 열자, 아이메시지로 보내온 것은 제가 찍고 제 손으로 삭제했던 사마토키 본인의 사진이다. 좀처럼 볼 일 없는, 활짝 웃고 있는 아오히츠기 사마토키의 얼굴. 삭제했을 터인데, 삭제된 항목 탭에 들어가 이 데이터를 되살려 메시지로 보낼 생각을 한다고. 어쩐지 머리에 열이 뻗쳐 뒤를 돌자 남자의 얼굴에 비스듬히 웃음이 걸렸다. 사진처럼 활짝 웃는 것은 아니지만 이전처럼, 으레 제 어깨에 팔을 걸치고 보여주곤 했던 그 얼굴로.


“이치로.”


그러니까 지금 이름을 부르는 건 반칙이다.


“그거면 보수로는 충분하겠지.”
“…아니.”


다시 말하건데,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형탈은 꽤 괜찮은 부분이 있었다. 조금쯤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으므로. 부정 다음에 올 말을 잠자코 기다리던 남자가 말이 이어지지 않자 고개를 기울인다. 거리가 재차 가까워졌다. 이번에는 시야가 트이자마자 부슬거리는 머리칼에 가로막혔다.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술을 물어뜯을 기세로 파고들어 혀를 빨아올리는 감각이 아득했다. 축축한 뒷머리 사이로 손가락이 파고들자 아랫배에 힘이 들어간다. 우두커니 서 있던 이치로 쪽에서 몸을 기울이자 사마토키가 놀리듯 떨어졌다. 그리곤 손에 들고 있던 탈을 반대로 씌웠다가, 반 바퀴 돌려 제대로 앞뒤를 맞춘다.


“이걸로도 안 되나.”
“되겠냐고…….”


뭐에 스위치가 켜진 건지는 몰라도, 기분 좋은 듯 터지는 웃음이 놀이공원 스피커에서 나오는 경쾌한 음악과 잘 어울렸다. 이치로가 아슬아슬 쥐고 있는 휴대폰을 갈무리시키며 사마토키가 어깨 부분을 두드렸다.


“퇴근하고 전화해. 부족한 거 해줄 테니까.”


그리고는, 미련 한 점 없는 사람처럼 깔끔하게 주차장 쪽으로 멀어진다. 한참을 못박힌 사람처럼 그 뒷모습을 보던 이치로가 여즉 켜져 있던 액정에 인형 털옷을 가져다 박았다. 분명히 바보인데, 어떤 부분으로는 도무지 이길 수가 없다. 그리고 제일 최악인 건 저 사람이 이렇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좀 져도 좋다고 생각하는 자신이었다.

놀이공원의 낮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차임벨이 울렸다.

     

써미 2025-09-22 12:29



“수고하셨습니다.”


비틀비틀 걸어온 ‘치로’가 묘하게 힘 빠진 동작으로 꾸벅 상체를 숙였다. 그럴 만한 날씨였으므로 스태프는 다 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털옷을 벗어던지자 곧 터질 것처럼 새빨간 얼굴이 드러난다. 이름만 대면 으레 누구든 알아차릴 남자는 이케부쿠로 디비전의 야마다 이치로였다. 해결사라는 건 남의 아르바이트 대타도 뛰어주는 건가. 실물로 보니 그 파괴력이 엄청난 것이, 온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고양이 탈을 벗겨 놓으니 절로 눈이 내리깔린다. 어쩐지 조금 화가 난 것도 같은 무표정한 얼굴을 핏줄 돋은 손이 쓸어내렸다. 일이 많이 힘들었던 걸까?

흰 티셔츠며 청바지가 땀에 흠뻑 젖어 몸에 들러붙어 있는 게, 티브이 화면 안에서 보는 것보다도 박력이랄지 두께가 굉장했다. 사람 몸을 빤히 보면 안 되지. 의식해서 고개를 돌렸음에도 그대로 눈에 선할 만큼이나. 쾅, 하는 큰 소리가 나서 돌아보자 조금 전까지 얌전하게 옷을 벗어 넣던 그 야마다 이치로가 캐비넷에 이마를 처박고 있었다.


“어엇…. 괜찮으세요? 소리가 꽤 컸는데요.”
“……. 괜찮습니다.”


원체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던 탓에 이마가 부딪힌 건 티도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대답도 반 박자 느린 게, 혹시 열사병인가 싶어 근처로 다가서 캐물어 봤으나 정말 괜찮다는 예의바른 답만 돌아올 뿐이다.


“혹시 스태프용 티셔츠 한 장만 빌릴 수 있을까요.”
“아, 그럼요.”


돌려줄 필요는 없다고 내민 티셔츠는 놀이공원을 오픈하면서 넉넉하게 뽑아 둔 굿즈 중 하나였다. XXL 사이즈의 티셔츠 위에는 큼지막한 고양이 캐릭터 프린팅 옆에 키치한 폰트로 ‘치로 파라다이스’라고 적혀 있다. 이치로는 그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스태프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백팩을 둘러 메고 휴게실을 나섰다. 아르바이트는 이걸로 종료였다. 퇴근하면 전화해. 남자의 목소리가 귀에 맴도는 것 같았다.

바로 화장실로 직행해서 들러붙은 옷을 벗고 쿨링 티슈로 몸을 닦았다. 찝찝한 건 여전했지만 임시방편은 되었다. 바지는 갈아입을 수 없었지만 허리께며 브리프 안쪽까지 대충 닦은 뒤, 받아 온 새 티셔츠를 입은 이치로가 세면대에서 목부터 물을 끼얹었다. 줄줄 흐르는 찬물에 얼굴의 열기가 그나마 좀 식는 것 같았다. 대체 정문부터 이곳까지 무슨 정신으로 돌아온 걸까. 털옷 안쪽으로 아래가 단단해져서는 어기적거리며 걸어가는 감각 같은 건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이게 다 아오히츠기 사마토키 때문이다. 왜 마주쳐서는, 왜 알아채서, 모르는 척 할 수도 있었던 걸 굳이 붙잡고 입을 들이미는데.

부족한 걸 해주겠다니…. 뭐가 부족할 줄 알고? 아랫입술을 질근거리던 이치로가 손만 위로 올려 수도꼭지를 잠궜다. 너무 차가운 물을 맞고 있었던 건지 골이 쨍하게 울렸다. 머리를 털어내고 얼굴이며 목 위로 남은 물기는 두루마리 휴지를 이용해 훔쳤다. 이 정도면 아까보다는 나을 것이다. 전화하라는 말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고 있는 제가 우스울 지경이었으나. 그러던 와중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휴대폰의 진동이 울려 이치로는 말 그대로 조금 굳었다.

어쩐지 긴장한 채로 휴대폰을 꺼내자 화면에 보이는 이름은 사부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제 남동생이었다.


‘이치니, 일은 끝나셨나요? 지금쯤이면 끝나셨을 것 같지만 혹시나 싶어서 메시지로 보내요. 예보에 없던 비구름이 그쪽으로 몰려가고 있다는데… 꽤 심상치 않아서요. 조심히 돌아오세요! 여의치 않으면 그냥 묵고 오시는 것도 좋을 것 같고요.’


비구름? 아까까지만 해도 맑았는데 무슨 소리지. 하지만 어지간한 일기예보보다도 정확한 야마다 가 삼남이 그렇다고 한다면 십중팔구, 아니 99% 정도는 맞을 것이다. 비단 일기예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데이터에 훤한 자랑스러운 동생이었다. 복도 너머로 희미하게 울리는 놀이공원 테마곡은 낮의 멜로디가 재즈풍으로 바뀌어 있었으나, 아직 빗소리 같은 건 들리지 않았다. 기왕 옷을 갈아입은 참이니 조금 속도를 내서 이케부쿠로로 돌아가는 게 베스트일 터다. 머리로는 알았다. 아는데…. 일단은 알았다고, 두 시간 후까지 귀가하지 않으면 묵고 오는 걸로 알아 두라고 답변을 보내 두고는 다시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건물을 빠져나오자 희미하게 비 오기 전 특유의 물비린내 같은 것이 공기에 맴돌았다. 밤인 데다 놀이공원의 조명이 별천지라 하늘이 흐린지는 잘 모르겠지만, 과연 곧 비가 쏟아질 것 같기는 했다. 이치로는 고민했다. 딱 저 멀리서 관람차가 한 바퀴 돌아갈 만큼의 시간 동안. 짧은 고민을 마친 이치로는 부재중 전화를 찍어 아오히츠기 사마토키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는다.
뭐야, 이 사람?

그대로 요코하마로 돌아가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관계임은 알았다. 하지만 본인 입으로 내뱉은 말 정도는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적어도 마음이 바뀌었다, 정도는 말해 줄 거라는 기묘한 확신 앞에 이치로는 한 번 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이 다섯 번째로 넘어갈 즈음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등 뒤와 귀 옆에서 동시에 울렸다. 이치로. 심장이 쿵 내려앉는 효과음이, 저 뒷편 자이로드롭의 낙하와 퍽 타이밍 좋게 맞아떨어진다.


“한참 찾았네.”
“뭐? 누가 할 소릴….”
“아까 그 고양이 탈은 어디다 갖다버렸어? 눈에 안 띄잖아.”
“일 끝났는데 뭐하러 그걸 계속 쓰고 있어.”
“쓰고 있는 게 더 귀여웠는데.”


아깐 싫다며. 튀어나온 말에는 대꾸 없이, 사마토키가 시선을 제 등 뒤로 둔다. 밤의 놀이공원이 펼쳐진 곳으로. 무언가 찾는 거라도 있나 싶어 고개를 돌리자 바로 손목이 잡혔다. 그래도 인형탈을 벗었다고 뒷목이나 꼬리가 붙잡히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막무가내로, 끌려가다시피 선 곳은 아까 제가 돌아가는 것을 보며 전화를 걸던 관람차 앞이다. 퍼레이드를 보러 갔는지 아니면 때늦은 폭우 소식에 이른 귀가를 결정했는지 줄 없이 한산했다. 직원이 흘끔거리는 것이 느껴져 잡힌 손을 내려다보자 사마토키가 손에 힘을 풀었다. 오른손을 들어올리자 팔찌들 위로 둘러진 프리패스 입장권이 너덜거린다.


“아, 네! 확인되셨습니다.”
“어이.”
“…? 나는 없는데.”


입장권을 끊고 들어온 것이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더 당황스러운 건 이 관람차에 저와 탈 생각을 한 아오히츠기 사마토키다. 스릴을 즐길 수 있는 기구들 사이에서, 좁고 밀폐된 정적인 기구 안에 갇혀 뭘 하겠다고. 왜 없어? 일일 알바한테 그런 것도 안 주나. 사마토키가 곤란하다는 듯 얼굴을 구기자 직원이 볼캡을 꾹 눌러 쓰고 우물거렸다.


“저, 저어. 이케부쿠로 디비전이랑 요코하마 디비전… 맞죠?”


더 숨길 것도 없어 이치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팬이거든요. 한 번 정도는 탑승할 수 있게 도와드릴게요.”
“아니,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아니에요! 오늘 마스코트 일도 하셨다면서요.”


직원들끼리 화제였다며, 무언가 결의를 다진 듯 주먹까지 쥐고 속닥거리는 직원에게 고개를 내저었으나 그보다 사마토키의 행동이 더 빨랐다. 그럼 부탁 좀 하지, 하고 길쭉한 몸이 날렵하게 관람차 칸 안으로 접혀 들어간다. 굳어 있던 이치로도 슬슬 기구를 가동시켜야 한다는 직원의 말에 후다닥 관람차 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문이 닫히고, 무릎이 서로 부딪힌다. 혀를 찬 사마토키가 이치로의 다리와 다리 사이로 발을 두었다. 더 부딪히지는 않았지만 테트리스라도 하듯 겹친 다리가 도리어 이상해 보였다.
관람차가 삼분의 일 정도 올라갈 때까지도 아오히츠기 사마토키는 말이 없었다. 별이 보이지 않는 하늘 덕에 관람차 아래로 놀이공원의 전경만이 번쩍거렸다. 유리창에 비친 옆얼굴이 낮에 본 것보다 갸름한 건 기분 탓인가….


“뚫어지겠다.”


높낮이 없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꼭 멜로디처럼 흘러 이치로는 괜스레 뒷목을 쓸었다.


“왜, 또 사진이라도 찍게?”


옆을 내려다보던 시선이 정확히 제게로 꽂혔다. 선명한 붉은빛에 목이 탄다. 주머니 안의 휴대폰에는, 아직 메시지 창이 켜져 있을 터였다. 야마다 이치로가 찍고 아오히츠기 사마토키가 보내 준 그의 웃는 사진이.


“당신이 이상하게 굴잖아.”
“남의 얼굴을 대문짝만하게 찍은 네놈은 뭔데.”
“…부탁받았으니까 찍은 것뿐이야.”
“아까, 섰지?”


대화가 이리 튀었다가 다시 저쪽으로 꽂힌다. 종잡을 수 없는 화법에 말려들면 손해를 보는 건 저뿐이라는 것 따위 알고 있다. 속눈썹 아래 고양이처럼 가늘어진 동공이 겹쳐 둔 다리 사이를 훑었다가 다시 올라온다. 그것만으로도 순간 몸이 저릿해졌다. 뭔, 파블로프의 개도 아니고…. 제 몸뚱이가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입을 다물고 상대를 노려보자 목 안으로 웃음이 흩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대로 몸을 기울이자 거리감이 훅 가까워졌다가 도로 멀어진다. 이치로의 턱 위를 잠깐 매만졌던 손끝이 의자 옆을 툭툭 두드렸다.


“좀 참아 봐, 대관람차에서 빼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빼준, ……. 말 좀.”
“동정 티 내지 말고.”


언제까지 저 사람에게 동정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거지. 본인이랑 한 건 없던 일로 치는 건가? 차마 따져 묻지는 못할 대사였으므로 이치로도 고개를 돌렸다. 궤도가 천천히 기울다 이내 두 사람이 탄 칸이 제일 높은 곳으로 올랐다. 찬찬히 경치를 관람하라는 건지 일 분 여간 멈춘 관람차에 사마토키의 몸이 유리창 쪽으로 기울었다. 창 밖 어딘가를 맴돌던 시선이 이내 한 곳으로 고정된다. 저거군, 중얼거리는 데에 이치로도 따라 시선을 두었다. 그래 봐야 그 시선이 좇는 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갓 개장한 놀이공원의 뒷문 부근은 따뜻하고 밝은 느낌의 정문과는 달리 어두컴컴했다. 저기 무엇이 있었더라. 다 쓰러져 가는 건물들과 관리가 되지 않은 녹지?

카텐구미의 일인가, 문득 이치로는 깨달았다. 그런 거라면 스스로 들뜰 일도 기대할 것도 없었다. 내도록 울렁거리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그러는 사이 아오히츠기 사마토키는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몇 장 찍고는 도로 집어넣었다. 뺨 위로 관찰하듯 시선이 닿는 감각이 생경했다. 느껴지는데도 눈을 맞추지 않는 것은 서운함의 말로였고. 과연 애새끼 소리를 들을 만한 짓인데도, 저 혼자 기대했다가 실망한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침묵 속에서 관람차 내부 스피커만이 노이즈가 낀 놀이공원의 테마곡을 뱉어 내는 동안, 불현듯 유리창 위로 작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빗방울이다. 툭, 투둑. 놀라 몸을 바로 세우자마자 연속적으로 떨어지는 물줄기에 사마토키가 혀를 찼다.


“…너 우산 있냐?”
“없어. 아, 트렁크에는 있을지도.”
“쯧, 낮까지는 그렇게 맑더니….”
“운전하기에 위험할 정도로 온다는 모양이던데. 사부로가.”
“그 꼬맹이가 그렇게 말하는 거면 믿을 만 하지. 그보다 비 소식을 알고 있었으면 말을 하든가.”
“말할 틈도 없이 잡아 끌었잖아.”


조금씩 굵어지는 빗줄기를 노려보던 사마토키가 늘어트렸던 다리를 꼬았다. 동시에 이치로의 정강이 께에 워커의 끝이 닿는다. 관람차를 지탱하는 레일에서 끼익, 하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일종의 위험 신호랄까.


“여기까진 어떻게 온 건데?”
“아? 당연히 얻어 타고 왔지. 그 꼬맹이를 데리고 내가 운전했겠냐.”


꽤 하드보일드했던 사마토키의 운전 실력을 돌이켜보던 이치로가 납득하다가, 다시금 눈앞에 놓인 사람의 위치를 자각하고야 만다. 얻어 타고 왔다는 건 아마 조직원의 세단일 터였다. 이제 아오히츠기 사마토키는 따로 챙기지 않아도 우산을 씌워준다거나, 담뱃불을 붙여주는 깍듯한 시중들이 퍽 익숙한 사람인 것이다.


“그럼 지금도 대기중인 거 아냐? 우산 가지고 나오라고 하면 되겠네.”
“너한테 일 마치면 전화하라고 했잖아.”
“…그래서?”
“부족한 걸 해준다고도 했고.”
“그러니까 그게.”
“네놈은 가끔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것 같은데.”


짓씹듯 뱉어 둔 사마토키가 손을 뻗어 티셔츠의 목을 틀어쥐고 당겼다. 뒤로 물러날 공간조차 마련되지 않은 채로 거리감이 훅 좁혀든다. 서로 다른 색의 눈이 일렁거린다. 그 안에 그득 차오른 것이 실망과 기대와 제가 어떻게 해줄 수 없는 억울함인 것을 모르지 않았으나, 이번만큼은 사마토키도 할 얘기가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정말 몰라?”
“…….”
“아니, 모르는 척하는 거겠지. 빌어먹을 위선자 새끼.”
“이거 놔…. 내가 언제 모르는 척을 했다고.”
“그런 기분이 들었으니까 키스한 건데, 지금 네놈 말하는 본새가 내빼는 꼬라지잖아.”


왜?
아주 본질적인 질문은 끝내 뱉어지지 않고 혀 끝에서 스러진다. 그럴 만한 마땅한 이유 없이, 그냥 ‘그러고 싶어서’가 이 행동거지 일련의 동기라고 해도…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닌가. 야마다 이치로는 그랬다. 무엇을 하더라도 이 밤이 끝나면 없던 일이 될까 봐 두려웠고, 제가 의미를 부여하는 데에 사마토키가 질린 얼굴을 할까 봐 무서웠다. 그러나 제일 최악인 건 그래서 다음으로 넘어가기 싫냐고 물으면 아니라는 점이다. 귓가에 남은 피어싱 자국이 어떻게 해도 옅어지지 않는 것처럼, 남자의 시선을 줄곧 좇게 되는 건 일종의 습관이었다.


“당신이야말로 몰라, 사마토키. 나는….”


목이 졸린 것마냥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거의 속삭이는 듯한 데시벨에 남자의 한쪽 눈썹이 들렸다. 입술이 벌어졌다가 다물린다. 그러니까 지금도,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내가 뭘 모르는데, 하는 대사 끝으로….


“네에, 오늘의 운행은 종료입니다!”


빗소리에 묻히지 않도록 텐션을 끌어올린 발랄한 대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사마토키가 무언가 욕설을 뇌까리고 입을 다문 것과 이치로가 의자 끄트머리로 몸을 내팽개치듯 뒤로 물린 것도 거의 동시다발적이다. 모자 챙 밑으로 직원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들이치는 빗물에 흐려진다. 관람차가 한 바퀴 도는 사이 밖은 거의 폭우에 가까운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다리를 내뻗기 곤란할 정도의 날씨였다. 비가 퍼붓는 마당에 기구를 타겠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없었으나 내리기는 해야 했으므로, 이치로가 막 발을 밖으로 빼려던 참에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예의 직원이 1인용 비닐 우산을 내밀고 있었다. 엉겁결에 받아든 채로 이치로가 빗소리에 묻힐까 목소리를 높였다.


“저기! 이걸 주시면….”
“저는 여분이 있어서 괜찮아요. 친구랑 같이 퇴근할 거기도 하고.”


소리치듯 말하고는 팬이라니까요, 하고 덧붙이는 웃음이 해사했다. 때로 쏟아지는 관심과 호의가 이제는 익숙했으나, 남을 돕는 직종이다 보니 여전히 멋쩍기는 했다. 더 거절하기도 뭐해 우선은 고개를 숙였다. 나중에 동창 놈을 통해 새 것을 전달하든가 하기로 하자. 그리고 그 잠깐 사이 아오히츠기 사마토키가 관람차에서 몸을 빼내어 걸음을 옮긴다. 앞에 멀뚱히 우산을 붙들고 서 있던 저는 깨끗이 무시한 채다. 야마다 이치로는 그가 어느 부분에선가 화났음을 직감했다. 잠깐 눈을 뗀 사이 저만치 멀어진 인영에 당황하며 이치로가 뛰듯이 걸어 그 머리 위로 우산을 기울인다. 이미 폭삭 젖은 채라 별 소용은 없을 것 같았으나. 그러는 사이 이치로의 어깨 끝도 젖어들었다.


“어디 가?”
“네놈이 별 생각 없어 보여서 돌아가려고.”
“차도 없다며.”
“지금부터 부르면 돼.”
“이렇게 젖어서? 좀 걸릴 거 아냐.”
“무슨 상관인데?”
“상관이…!”


왜 없는데. 귓전을 때리는 빗소리에 목소리 톤이 높아져 주변에서 보기에는 거의 다툼에 가까웠다. 몇 안 되는 주변 시선이 모이기 시작하는 걸 느끼곤, 이치로가 사마토키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손에 억지로 쥐여준 우산을 두고 저는 밖으로 빠져나간다. 금세 운동화 안으로 물이 고여 철벅거렸다. 아무리 봐도 운전할 만한 날씨는 아니었지만 일단은, 차로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뒤에서 목덜미를 붙드는 힘에 엎어져 코를 박을 뻔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새것이었던 티셔츠의 목이 죽 당겨진 채 울대를 조였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거지. 왜 이 폭우 속에서 서로 밀고 당기는 짓거리를 해야만 하는 건지, 모든 게 바보 같아서 팔을 휘두르다 고개를 돌렸다. 축축하고 미지근한 공기 속에 사마토키의 체온만이 형형하게 뜨거웠다. 서로를 난도질하겠답시고 뾰족하게 세운 시선이 교차했다.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며 팽팽해진 실 끝을 먼저 당긴 것은 사마토키 쪽이었다.


“가.”


어디로, 왜, 그런 질문으로 다시금 소모하기에는 지쳐서 노려보던 눈을 거두고 이치로는 걸음을 옮겼다. 주차장과는 정반대 방향이다. 이쪽으로 가면 아마도 관람차 위에서 보았던 예의 후문이 나올 터였다. 혹시나, 담그려는 건 아니겠지…. 계속 뒷목 께를 잡힌 채로 걷는 것은 상당히 힘들었고, 어깨와 어깨가 계속 부딪혀 아팠다. 지름 60cm 남짓의 얇은 비닐 우산 같은 것은 남들보다 훌쩍 큰 두 남자에게는 한참 비좁아 고작 머리 위만 가려줄 뿐이었다. 2인 3각 경기라도 하듯 잘 맞지 않는 호흡으로 어떻게든 나아가긴 하는 게, 남들이 보기엔 퍽 웃긴 광경일 터였다.

어둑한 뒷문을 빠져나오자 방치된 풀숲 사이에 드문드문 가로등이 보였다. 그마저도 한두 개는 등이 나간 채였다. 저건 손을 봐야겠는걸, 하고 이치로는 생각한다. 아직 뒷문의 주차장은 공사 중이라 보통은 다시 정문으로 빠져나가겠지만, 이 꼴을 본다면 어린이들은 분명 무서워할 거다. 그와 멀지 않은 맞은편의 건물에 사마토키가 멈춰 섰다. 빗물에 젖은 손을 잡아 내리고 나서 이치로도 위를 올려다봤다. 오 층 남짓의 낡아빠진 건물은 도무지 뭘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전광판 같은 것이 붙어있기는 했는데, 그것도 전구가 나간 건지 알파벳 D, I, E 만이 띄엄띄엄 흐릿하게 빛나고 있었다…. 대뜸 사형 선고를 받은 기분에 뒷골이 오싹해지기도 잠시, 다시 사마토키의 손속에 질질 끌려 입구 안을 들어가자 웬 노인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어이.”


몇 번 더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그게 익숙하기라도 한 듯 사마토키가 팔을 창구 안으로 밀어 넣어 노인 옆의 열쇠를 하나 꺼냈다. 그런데도 일어나지 않는 게, 이 정도면 신고해야 하는 게 아닌지 유심히 지켜보다가 다시 어깨를 붙들렸다. 구석에 있는 엘리베이터는 비좁고 녹슨 소리가 나서 타기 무서울 정도였다. 덜덜거리는 소리와 함께 올라가던 엘리베이터가 3층에 멈춘다.


“열쇠를… 그렇게 막 가져가도 되는 거야?”
“어. 얘기 끝난 거라.”
“여기가 어딘데?”
“보면 모르겠냐?”


땡, 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복도 사이사이로 줄 지어 있는 문들이 보인다. 그와 동시에 사마토키의 입에서 대수롭지 않은 듯한 대사가 튀어나왔다. 호텔, 일단은. 이치로가 벙쪄 있는 틈을 타 404호라고 붙은 문에 열쇠를 집어넣은 사마토키가 안으로 들어섰다. 빨리 들어오지 않고 뭐 하냐는 호통은 덤이다. 얼결에 발을 옮기자 내부는 호텔이라기엔 모텔에 더 가까운, 구색만 갖춰둔 무언가였다. 벽지는 색이 바랬고, 킹 사이즈 침대의 매트릭스는 조금 꺼져 있었으며, 먼지 냄새 같은 게 났다. 그래도 나름 가지런히 놓인 수건 위에는 유행이 지난 필기체로 ‘호텔 파라다이스’가 전사되어 있었다.

아까 입구에서 본 DIE는 파라다이스의 끝부분이었나.


“너나 나나 이 꼴로는 못 갈 테니까. 놀이공원 중간에 드러누울 수도 없고.”
“…차로 가면 됐는데.”
“그럼 지금이라도 가든가.”


새끼가 더럽게 튕기네. 사마토키의 목소리가 낮게 깔린다. 선뜻 그러겠노라고 대답하지 못한 건, 이만치 젖은 몸으로 차에 들어가는 게 제법 찝찝했기 때문이다. 아까보다 더 거세진 비를 뚫고 놀이공원 정가운데를 걸어가기도 뭐한 일이라서.

…아니, 사실은 그냥 그 모든 걸 핑계 삼아 아오히츠기 사마토키와 같이 있고 싶었다. 이렇게 다 망해가는 싸구려 호텔이라도 좋으니까. 저 사람의 변덕이라도 좋으니까. 이치로가 현관에서 망연히 굳어 있는 사이 사마토키는 혀를 차더니 좁은 욕실로 들어갔다. 물 소리가 들린다. 욕조에 물을 받는 모양이었다.

머리 끝에 맺힌 물방울이 잿빛 카페트에 얼룩을 남겼다. 이대로 방 안에 들어가 침대에 누울 수는 없으니 사마토키가 씻고 나면 저도 몸을 좀 말리고, 그리고…. 하나뿐인 침대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싱글이 아닌 게 어디냐마는, 백팔십이 넘는 남자 둘이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고 눕기에는 턱없이 작은 공간이었다. 어쩐지 긴장한 채로 그것을 노려보고 있자니 문득 작게 재채기가 터졌다. 여름이라고 약하게 돌아가고 있는 에어컨 바람이 젖은 피부에 느껴진 탓이다. 닭살이 돋은 팔을 문지르고 있자니 욕실 문이 벌컥 열린다.

바지는 아직 입은 채였지만 젖어 들러붙어 있던 셔츠는 수건 옆에 걸려있는 채로, 그러니까 상반신은 완전히 나체인 아오히츠기 사마토키가 이치로를 끌어당겨 욕실 안짝으로 가뒀다. 일인용 욕조에는 물이 반쯤 차 있었다. 김이 서린 좁은 욕실 안은 바깥보다 훨씬 따뜻했으나 도무지 눈 둘 데가 없었다.


“왜, 아니, 당신, 먼저 씻으려던 거….”
“방금 추워서 기침한 거 아니냐?”


그게 들렸다고? 하여간에 오감 하나는 귀신같이 좋은 사람이었다. 문에 바짝 붙어 서 있자 사마토키가 청바지 버클을 풀기 시작했다. 금속 재질의 단추가 미끄러지는 소리가 제법 크게 울려서 이치로는 하마터면 발을 헛디딜 뻔했다. 안 그래도 꼭 맞는 데님이 물을 먹어 더 무거워진 건지 무어라 욕설을 내뱉는다. 바지를 벗느라 숙인 몸에 머리칼이 이마 위로 흩어진다. 누가 주저앉혀도 끝까지 서 있을 것만 같은, 골격이 탄탄한 몸이었다. 일견 말라 보여도 쥐면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단단한 피부가 흐릿한 조명 아래 부드러워 보였다. 힘을 주느라 푸른 핏줄이 비치는 팔과, 군살 없이 판판한 배와, 잘 갈라진 근육 따위가 움직이는 것이 슬로우모션으로 보였다. 그리고 젖은 셔츠에 쓸린 탓인지 뾰족하게 솟은 유두가….

툭.
금 간 타일 위로 점점이 떨어지는 검붉은 액체를 바라보다 이치로가 한 박자 늦게 코를 틀어막았다. 미친, 진짜, 제정신인가…. 마침 바지를 벗어내는 데 성공한 사마토키가 바닥을 보고 번쩍 고개를 들었다. 퍽 놀란 눈치였다. 젖은 것 외엔 말짱하던 놈이 갑자기 피를 쏟고 있으면 저라도 기겁할 테지만, 어디 맞거나 피곤한 것도 아니고 그냥… 그냥 흥분해서 코피가 터진 거라니. 고개를 숙이고 있자 턱이 붙들린다.


“뭐야? 어디서 피가, ….”
“아무, 것도 아니니까. 난 그냥 나가 있을게.”


사납게 올라간 눈썹 아래로 긴 속눈썹이 깜빡인다. 그게 꼭 저를 걱정해 주는 것만 같아서 황급히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러자마자 검은 브리프며, 길쭉하고 마른 다리와 맨발이 시야에 들어와 아예 감아 버리고 말았지만. 대강 손으로 틀어막고, 뒤돌아 문을 열려고 하자마자 목 옆으로 팔이 홱 뻗어진다. 문짝이 뜯어질 만큼 강한 힘으로 도로 닫혔다.


“봐.”
“괜찮다니까.”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이리 오라고. 멎어야 될 거 아냐. 그 꼴로 피만 말라붙으면 꼭 사람 하나 죽인 꼴일 텐데.”


어째서인지 이 사람이 이런 톤으로 말하면 거부할 수가 없다. 지금의 사마토키는 제가 좋아했던, 한참은 크고 멋있게 느껴지던 어른 같지도 않은데. 스스로도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는 것은 익숙했다지만 누군가 그만치 살뜰하게 살펴 주는 경험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것도 다 지나간 얘기였다. 야마다 이치로는, 이제는 좀처럼 다치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다칠 일은 아오히츠기 사마토키 쪽이 많을 터였다. 조직 간의 일이라든가, 마이크를 쓰는 시대에서도 아직 폭력이 존재하는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런 것 치고 몸은 예의 총상 하나 빼고는 멀쩡하지만…. 잠깐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구석구석 본 건데. 스스로의 시력에 감탄할 겨를도 없이 머리칼을 붙든 손이 세면대 위로 고개를 처박는다. 우악스럽지는 않아도 섬세하지도 않은 손길이었다. 같은 팀이었을 때는 그렇게 다정했으면서.


“고개 젖히면 기도 막힌다. 이대로 코 위쪽 누르고 있어.”
“알거든, 그쯤….”


이 년 전에도, 까지 속삭이다 입을 다문다. 그러자 사마토키도 조용해진다. 동시에 같은 심상을 떠올린 탓이겠지. 더티독 때의 일을 꺼내지 않는 것은 둘 사이의 어떤 불문율이었으나, 종종 튀어나올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것까지가 이 케묵은 관계의 완성이었다. 지금도, 말을 꺼내지도 듣지도 못한 척 둘 다 입을 닫고 기묘한 침묵이 이어지는 중이다. 세면대에 물줄기가 부딪히는 소리만이 울리다가 얼추 피가 멎자 이치로가 수도를 잠그고 고개를 들었다. 피는 닦아냈지만 달아오른 얼굴이며 퀭한 눈두덩이 영 못 봐줄 꼴이었다. 거울 한켠에는 거의 수평에 가까이 물이 차오른 욕조와 팔짱을 낀 사마토키가 보였다. 쪽팔려서인지 피곤해서인지, 반쯤 섰던 아래도 가라앉은 채다.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대충 멎었으니까 나가 있는다. 씻고 나오던지.”
“아니.”


퍽 단호한 대답 뒤로 사마토키가 단숨에 제 티셔츠를 위로 끌어올린다. 반사적으로 팔을 위로 들어올리자 젖은 티셔츠가 욕실 구석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리고는 그대로 허리를 숙여 바지까지 벗겨내려고 하는 통에 이치로가 기겁한 투로 사마토키의 어깨를 짚는다. 잠깐, 잠, 어이, 당신, 사마토키! 숙인 자세 그대로 고개만 들어 바라보는 얼굴에는 무슨 문제라도 있냐고 써 있다.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문제였다. 제일 큰 문제는 다시금 달아오르기 시작한 제 몸이었고.


“뭐… 하는데!”


비명에 가까운 항의가 튀어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오히츠기 사마토키의 손은 멈추지 않았고, 이치로가 힘을 주어 밀어도 지나치게 꼿꼿한 몸은 흔들림이 없었다. 제 옷마냥 단추를 끄르고 지퍼를 내리다가 멈칫한 건 사마토키의 손끝에 부피를 키운 성기가 닿았기 때문이다. 시선이 단숨에 그리로 꽂힌다.


“보지 마!”
“…뭘? 네놈 자지가 선 걸?”
“그렇게 말하지 말, 아니, 만지지도 말고…. 애초에 왜 이렇게 된 건데?!”
“너 설마, 코피 쏟은 것도….”


피곤해서 그런 게 아니었어? 중얼거리던 사마토키가 제 얼굴과 아랫도리를 번갈아 보다 뭔가 깨달은 듯 헛웃음을 지었다. 피곤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코피가 터진 건 사마토키 때문이 맞다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는 채로 이치로가 고개를 돌렸다. 귓바퀴부터 목덜미까지 죄 빨갛게 달아오른 게 조금만 더 하면 또 어딘가 터질 것 같아서, 사마토키는 혀를 차고 순식간에 잡고 있던 청바지를 미끄러트렸다. 그리고는 이치로가 무언가 항변할 시간도 주지 않고 퍼덕이는 물고기라도 잡듯 붙잡아 욕조 속으로 처박는다. 속옷을 입은 채로 뜨거운 물에 들어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당사자가 허우적댔다. 그래 봐야 그 키에는 한참 작은 욕조 안이라 미끄러지지도 빠지지도 않았지만. 그리고 사마토키는, 한 장 남은 속옷까지 거침없이 벗어던지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욕조로 들어와 맞은편에 몸을 기댔다. 기댔다라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는 것이, 거의 테트리스라도 하듯 뭉갠 느낌에 가까웠으나.

도망치고 싶다. 야마다 이치로는 생각했다.

하지만 도망칠 곳이 없었다. 이미 등이 눌려 아플 만큼 최대한 몸을 쭉 뺀 채였다. 아까의 관람차보다도 가까운 거리감이, 부딪히다 못해 포개진 다리가, 물 밖이며 안으로 보이는 실루엣과 닿아 있는 살갗의 느낌이 전부 다 비현실적이기 짝이 없었다. 두 사람의 부피만큼 욕조에서 물이 넘쳐흘러 욕실 바닥을 적셨다.


“당신은 진짜, 최악이야, 사마토키….”
“칭찬이냐?”


그럴 리가. 명치께까지 차오른 물을 손바닥으로 퍼 얼굴을 묻었다. 그냥 그대로 좀 두면 좋을 텐데, 아오히츠기 사마토키는 그조차 허락하지 않고 손을 잡아 끌어내린다. 아까까지는 뾰족하게 날이 서 있었는데, 묘하게 올라간 입매가 꽤 기분 좋아 보였다.


“뭐가 그렇게 최악인데.”
“전부 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그러니까 전부 다라고 했잖아….”


최대한 무릎을 모아 세우고 그 위로 끌어안듯 팔을 둘렀다. 하루 온종일 서 있었던 탓에 뭉쳤던 근육이 조금이나마 녹아내리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기분 탓인지, 제가 물러난 만큼 더 뻗어 건드리는 감촉이…. 이마 위로 들러붙은 머리칼 사이로 곁눈질하자 아오히츠기 사마토키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이쪽은 종아리를 거쳐 허벅지 안짝을 누르는 발바닥에 혀를 씹을 뻔했는데도. 이치로가 사마토키의 발목을 잡아챘다. 희고 단단하고 크고 힘줄이 돋은 남자의 발이다. 그런데도, 이런 것에 발정하다니. 오늘 내도록 두꺼운 털옷 너머로 닿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던 마음이 술렁였다.


“대체 어쩌고 싶은 건데?”
“그건 내가 네놈한테 칠 대사지.”
“뭐를….”
“전화했잖아? 그럼 그 뒤를 기대한 걸 테고.”
“…어차피 나 때문에 남아있던 것도 아니면서.”
“그건 무슨 소린데.”
“아까 관람차에서, 어딜 살피고 있었잖아. …카텐구미 일 아냐?”


그건 진심으로 의외라는 듯 사마토키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래서 그렇게 갑자기 세상에 불만 있는 애새끼 같은 표정을 지은 건가?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발끈하고 만다.


“뭐어, 겸사겸사긴 한데.”
“겸사겸사라는 건.”
“이 다 쓰러져가는 호텔, 우리 쪽에서 재개발 들어가기로 한 거라서. 앞에 놀이공원이 생겼으니 숙박업 벌이면 돈이 되잖아? 그래도 묵을 필요까진 없었거든.”
“…재개발? 이 건물을?”
“그렇다니까.”


위치 파악할 겸, 어디까지 허물고 얼마나 위로 쌓을지도 좀 계산해 보고. 욕실에 딸린 흐릿한 창문 너머로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놀이공원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저 관람차에서 이 호텔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거라고.


“그냥 들여다보고만 오라고 했는데 굳이 방을 잡은 게 무슨 뜻이겠냐.”
“…무슨 뜻인데?”
“너 아까부터 말끝마다 물음표 붙이고 있는데, 아무리 연애 못 해 본 동정 오타쿠 새끼라도 이렇게까지 눈치가 없어서 어디다 써먹는데.”


잡힌 쪽 말고 왼발로, 사마토키가 이치로의 브리프 위를 꾹 누른다. 윤곽을 덧그리듯 위아래로 문지르는 동작에 이치로가 몸을 바짝 굳혔다. 온 신경이 눈앞의 사람에게 가 있어, 숨을 들이키고 내쉬는 것이 어색할 정도로 버거웠다. 이치로가 이를 악문다.


“이 몸 시간은 비싸거든. 오늘 네놈이 하루 어울려준 것 정도는 차원이 다르게.”
“…후회, 해도, 몰라.”
“난 후회 안 해.”
“…….”
“후회하는 쪽을 따지자면 네놈이겠지, 이치로.”


유독 흔들림이 없는 목소리다. 저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뭐든 잘 될 것 같다고 생각했던 때를 기억한다. 제 행동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 특유의 올곧음으로, 아오히츠기 사마토키가 야마다 이치로를 바라본다. 그건 비단 지금뿐이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한 것임을, 이치로는 깨달았다. 집을 얻어주고, 해결사라는 직업이 잘 어울린다고 말해 주고, 키스하고, 몸을 겹치고, 그리고 버튼을 누른 것까지도.

그러면, 야마다 이치로는 후회하는 쪽인가? 아오히츠기 사마토키에 대한 감정은 그렇게 이분법으로 정리할 수 없었다. 어떤 때는 원망이었고, 어떤 때는 그리움이었으며 또 어떤 때는 애정 비스무리한 것. 그리고 아마도 사랑…. 세간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 잘 살다가도 같이 걸었던 거리를 지나가면 속이 잔뜩 헝클어지는 기분과, 닿고 있어도 불안한 마음이 뒤죽박죽 교차했다. 어떤 때는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싶다가도 그럴 수는 없다고 고개를 젓는다. 아오히츠기 사마토키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야마다 이치로는 없다.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하겠지. 이치로도, 사마토키도.

그러니까 어느 쪽이냐 하면, 후회하게 되더라도 좋았다. 지금도 여전히. 아오히츠기 사마토키가.


“후회 안 한다고는 당신이 말한 거야.”


이제 슬슬 정말로 한계였던 탓에, 쥐고 있던 오른발 위로 입술을 붙인다. 도드라진 복숭아뼈를 이로 갉작였더니 드물게도 움찔하는 얼굴이 유쾌했다. 다른 손으로는 내내 찝찝했던 브리프를 내려 욕조 밖으로 내던졌다. 철퍽, 하는 소리가 어딘가에서 울렸으나 그보다는 기다렸다는 듯 배까지 올라붙은 성기가, 사마토키의 발등과 닿아 있다는 게 더 신경 쓰였다. 왜 이렇게 커, 하는 질린 목소리에 조금 더 부피를 키운다. 발등 위에 쪼듯이 키스하자 발끝이 움츠러든다. 작게 웃음이 새자 응수하듯 사마토키가 이치로의 것 위로 발을 붙인다. 물 속에서 저 사람이 내 걸, 발바닥으로 문지르고 있다니. 솔직히 말해 조금 아플 만큼 서툴렀으나 그게 오히려 좀 흥분됐다.


“사마토키….”
“읏, 깨물지 마. 개도 아니고.”


당신의 개가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굳이 말하지는 않았으나 사마토키도 알았을 것이다. 부르면 꼬리를 흔들며 달려오는 게 개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잇자국이 난 곳을 핥아올리며 이치로가 사마토키의 발목을 홱 끌어당겼다. 물이 찬 욕조라는 건 제법 미끄러웠으므로 몸이 죽 딸려온다. 이 새끼가…! 안 그래도 좁은 욕조의 밀도가 더 높아지고, 다시금 바깥으로 물이 출렁이며 넘쳤다. 다리와 다리가 부딪히자 이치로는 차라리 사마토키의 허리를 들어올려 제 위로 앉히다시피 했다. 좀전의 이동으로 물이 끼얹어지다시피 한 사마토키가 손으로 앞머리를 넘겼다. 드러난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키스해 줘.”
“하아?”
“아까처럼.”


조르기라도 하듯, 이치로가 허리를 퉁겨 올렸다. 구멍 사이로 미끌거리는 자지가 문질러진다. 미친 변태 새끼가 뻔뻔하게, 중얼거리던 사마토키가 이치로의 뒷머리를 난폭하게 쥐고 꺾었다.


“혀 내밀어.”
“하.”


도대체 누가 변태인 건데, 하는 말은 서로의 입술 새로 삼켜졌다. 이치로의 혀를 제 것으로 느긋하게 문지르다가, 갈급한 사람처럼 사마토키의 혀를 빨아올리는 이치로에게 일단 주도권을 넘겨준다. 고작 키스인데도 외설스러운 소리가 욕실을 채웠다. 못 기다리겠다는 듯이 조금씩 들썩이는 허리에 사마토키의 손이 이치로의 뒷목을 감았다가, 어깨를 잡았다가, 미끄러져 등을 할퀴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숨이 차는 게 슬슬 위험하겠다 싶어 사마토키가 이치로의 가슴을 밀었다. 입술과 입술 사이로 타액이 길게 늘어진다.


“새끼가, 숨 좀 쉬어가면서….”


더 듣지 않겠다는 듯 다시 입이 틀어막힌다. 이번에는 눈을 뜬 채로, 사마토키의 반응을 낱낱이 뜯어보겠다는 듯이. 여유 따위 없이 입술을 깨물고 핥고 빨아올리는 데에 사마토키가 눈을 찌푸렸다. 허리를 쥔 손이 단단한 엉덩이를 쥐고 내려가 구멍 위를 더듬었다. 뜨거운 물에 들어간 탓인지 말랑해진 곳에 손가락 하나를 집어넣자 사마토키가 맞물린 혀 위로 이를 세운다.


“기분 나빠.”
“무작정 넣을 순 없잖아.”
“그래도.”
“여기까지 해준다는 거 아니었어?”


내벽을 조심스럽게 문지르며 한쪽 유두 위로 이를 세우자 몸이 짧게 경련했다. 위로하듯 그 위를 핥고 빨아올리자 금세 도드라지는 게 또 야했다. 고작 그 정도로도 빠듯해서 제 것을 넣으면 잘리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욕설을 뇌까리며 제 어깨 부분에 이마를 문지르는 사마토키가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어깨 위로 닿은 이마에 땀이 배어나는 게 느껴졌다. 아래를 파고드느라 조금 시든 성기를 쥐어 매만지자 한숨과 함께 안쪽이 기분 좋은 듯이 조였다. 주름을 더듬어 손가락 세 개째를 집어넣자 몸이 떨린다.


“사마토키.”
“으, 거북하게….”
“괜찮아?”
“괜찮겠냐, 새끼가.”


지금 네가 넣는 입장이라고, 미친…. 물에 젖은 팔 위로 푸르게 핏줄이 솟았다. 차라리 얼른 넣는 게 나을까. 일단 넣기만 하면 기분 좋지 않았던가. 이 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도 추잡한 장면밖에 떠오르지 않았던 탓에, 그냥 아래를 푸는 데에 열중하기로 했다. 아래를 넓히며 움직이는 손에 물소리가 참방거리며 울렸다.


“흣, 으, 대충 하고 그냥….”
“안 돼.”
“넣어, 좀.”
“…힘들잖아.”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을까. 머뭇거리던 야마다 이치로가 물 먹은 솜처럼 제 몸에 기댄 사마토키를 붙들었다. 물이 아직 따뜻해서인지 처음보다는 제법 많이 풀린 채였다. 그러면, 하고 이치로가 사마토키의 허리를 틀어잡고 몸을 들어올렸다. 성기와 구멍 끝을 맞추고 찬찬히 몸을 내리자 허벅지가 떨린다. 벌어지고 몸 안쪽으로 밀려드는 감각이 선득할 정도였다. 안 돼, 이 자세는. 입을 벌렸으나 말이 나오질 않았다. 바람 빠지는 듯한 숨소리가 샜다. 제일 두꺼운 부분까지 들어오는 데만 해도, 둘 다 마라톤이라도 뛴 것처럼 식은땀이 배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솔직히 쉬운 일이라서….

골반을 붙든 손을 쭉 아래로 잡아 내렸다. 안쪽이 바짝 조여들어서 하마터면 바로 사정할 뻔했다. 목이 졸린 사람처럼 헛숨을 뱉다가, 꽉 조여진 등줄기 위를 다독이듯 쓰다듬는다. 사마토키가 매달리듯 욕조 뒤 벽을 짚었다. 몸이 후들거리는 건지, 건물의 내전 설계가 잘못된 건지. 이 망할 새끼는 말짱한 걸 보면 아마도 전자겠지만 깊어도 너무 깊었다. 이왕 섹스할 거라면 얌전히 침대로 갈걸, 어디에 스위치가 켜져서는. 몸 어딘가가 이상해진 것처럼 홧홧했다. 이대로라면 정말 죽을 것만 같아서, 맞닿은 몸을 필사적으로 끌어안는다.


“사마토키…, 움직여도 돼?”
“되겠, ….”


되겠냐고. 상식적으로, 네놈이라면. 그러나 이치로가 성기를 느릿하게 뺐다가 허리를 쳐올리자 혀가 굳었다. 기분이 좋으면 안 될 것 같은데 기분이 좋아서 문제였다. 안쪽, 기분이 좋아지는 어딘가를 누르는 수준이 아니라 문지르는 수준이라 내벽부터 울리는 느낌이었다. 시야가 점멸하듯 흐릿해진다. 덜덜 떨리는 몸을 붙들고 목덜미며 뺨 위로 입술을 부비는 감촉마저 죄 자극이었다.


“…섰네.”


감탄사마냥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잔뜩 흥분이 묻어난다. 그 말대로, 사마토키의 아래도 반쯤 발기한 채였다. 기분 좋은 거지, 하고 선단 위를 문지르는 손속에 다시 밭은 숨이 터졌다. 사내자식 좆을 뒤로 꽂고 발정하는 일 따위, 야마다 이치로가 아니었다면 상상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는데. 이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끝내주게 속궁합이라는 게 좋았다. 기실 누구라도 이런 걸 넣으면 느끼는 지점을 찾을 필요 없이 단숨에 기분 좋아질 테지만, 유독 그랬다. 사마토키의 표정을 살피며 허리를 들썩이던 이치로가 적당히 풀린 접합부를 매만지다 단숨에 쳐올렸다.

의식이 날아갈 것 같다. 아니, 잠깐 정도는 날아갔는지도. 귓불 위를 빨며 제 이름을 불러대는 소리가 멀었다가 가까워진다. 고통이 단숨에 쾌락으로 전환되는 속도가 놀랍도록 빨랐다. 잇새로 피어싱이 부딪히는 감각이 아득했다. 하여간에 적당히 할 줄을 모르는 애송이였다. 그렇게 두꺼운 거죽을 뒤집어쓰고도 온 신경을 제게로 부딪혀와서 따끔거릴 정도더니, 얼마나 하고 싶었던 건지. 전력으로 부딪히는 몸에 허리가 찌릿하게 울렸다. 기교 따위 없이, 다소 난폭하다고 느껴질 만큼 솔직한 섹스였다. 이 자식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나뿐일 거라고, 아오히츠기 사마토키는 흐려진 의식 사이로 생각했다.

사마토키의 사무실 소파 위에서건, 회식이 끝난 뒤 뒷골목에서건, 그리고 이렇게 다 망해 가는 호텔의 낡은 욕조 안에서건 간에. 야마다 이치로는 아오히츠기 사마토키를 늘 원했고 사마토키는 내심 그것이 만족스러웠다. 그게 당연하지 않을 거라곤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찔걱거리는 소리가 요란해지고 아래가 빠끔거리며 이치로의 것을 받아내었다.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이리저리 튀다가 끊긴다. 크고 작은 쾌락이 밀려들었다가 그대로 흩어졌다. 더 밀착할 수 없을 만큼 끌어안은 채로 이치로가 사마토키의 안에 사정했다. 내장 안이 꽉 찬 감각 따위, 실은 불쾌한 것임에도 기묘한 포만감이 들었다.

그러고 나자 물이 미지근해졌다는 게 느껴진다. 끌어안고 있는 몸이 더 따뜻했다. 심장 뛰는 소리가 평소보다 반 박자는 빠르다. 눈을 감고 있자니 무드 없는 대사가 흘렀다. 사마토키, 한 번만 더….
이 미친 새끼가.



*



이건 확실히 오버페이였다. 몇 번을 했는지, 당초 주려던 보수보다는 훨씬 많은 횟수임은 틀림없다. 하반신에 감각이 없잖아, 시발…. 곁에 붙어 누운 몸이 발길질 한 번에 저만치 밀려난다. 억울한 표정으로 금세 몸을 붙이는 꼬락서니가 귀여워 보이는 저도 문제긴 했으나. 등이 배기는 얄팍한 매트릭스 위에 나란히 누워 아침이 밝기를 기다리는 일 따위, 다시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사마토키의 허리께를 주무르던 이치로가 툭 질문을 던진다. 내내 물어볼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을 게 빤한 물음이었다.


“그런데 정말, 나인 줄 어떻게 알았어?”
“냄새라니까.”
“…먼지 냄새밖에 안 나던데, 그 마스코트 인형탈은.”
“너 스스로는 모르겠지. 뭐, 그것뿐만은 아니고.”
“그러면?”
“사진. …나를 그렇게 반짝거리는 눈으로 보는 건 예나 지금이나 네놈밖에 없을 거다.”


지금은 딱히 아니거든, 하고 반박하려던 말은 관두기로 한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고. 그런 걸 알면 잘했어야지, 하고 말하기에도 무언가 어색했다. 잊어버리자고 꺼내놓고도 잊을 수 없었던 건 마음이 너무 크기 때문이라서. 그리고 그건 아마 사마토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일 터다. 실감은 나지 않지만서도.


“…당신이 그렇게 웃는 걸 보고 싶어서 무리했었어.”
“알아.”
“알면 좀 웃어 주지.”
“꽤 많이 웃었던 것 같은데.”
“무리했을 땐 안 웃어 줬고, 내가 바보같이 굴었을 때나 좀 웃었을걸.”
“그때의 네놈은 귀여웠으니까.”
“하?”


지금은 안 귀엽단 소린가. 그야 귀여우면 안 되겠지만. 애새끼 취급 받는 건 이제 질색이지만. 이치로가 은근슬쩍 사마토키를 당겨 안았다. 밀어내지 않는다. 꽤 무리한 건지 이내 숨소리가 고르게 울렸다. 이 년 전 이후로 사마토키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때는 잠든 사람을 붙들고 속에 있는 말을 줄줄이 꺼내려다가, 망설이다가…. 몰래 입술을 붙이기도 했었다. 야마다 이치로는 종종 제가 알던 아오히츠기 사마토키라는 사람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덜 괴로웠으므로.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그렇지는 않았다. 요코하마의 리더가 되었을 뿐 여전히 여기에 존재했다. 완벽하고 멋진 어른인 동시에 둘 다 서툴렀던 시절을 건너서.
퇴실까지는 조금 남았으므로 이치로도 눈을 감기로 했다. 창 너머로 보이는 어슴푸레한 하늘은 깨끗하게 갠 채였다.

그리고, 요로즈야 야마다 사무실에 막 완공한 호텔의 숙박권 두 장이 도착하는 건 계절이 두 번쯤 바뀌고 난 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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